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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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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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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이 허물어진 건물더미들이나 보고 마는 것이라면 얼마나 허무할까. 모든 역사는 현재이듯이, 여행도 과거의 편린만 쫓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과거의 인물과 상황, 역사를 현재에서 만날 때 진정한 여행이 될 수 있다.


 <예수를 만나다>(아르테 펴냄)의 저자처럼 말이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면서도, 성경이 성령으로 쓰여졌다는데도, 예수가 ‘백년손님’처럼 느껴지거나, 오직 교회를 가야만 만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홀로 예루살렘을 순례하면서 예수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더듬었다. 발로만 따라간 것이 아니었다. 이 순례의 남다른 점은 2천년 전의 예수를 현재의 예수로 살려냈다는 점이다.

 저자는 <중앙일보> 종교담당 백성호기자다. 아마도 기자란 인터뷰를 상시로 하며 궁금한 것을 묻는 직업이기에, 보통의 여행자와는 달리 예수에게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어떤 사건의 주인공을 직접 등장시켜서 그 사건을 쫓아가는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예수와 동행하면서 예수사건을 샅샅이 훑었다. 예수가 태어나고 자라고 지나고 머물고 만나고 웃고 울고 죽었던 장소까지 말이다. ‘근원’을 탐구하면서 구도자적 자세를 견지해온 그대로 예수와 관련된 일화들의 근원을 파고 들었다. 그는 수년 전부터 신문과 인터넷, 에스엔에스 등에서 `현문우답'으로 `근원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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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가 첫번째 물은 것은 예수가 행한 숱한 기적들이다. ‘예수가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수천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건 너무도 인간적이고, 너무도 상식적인 궁금증이다. 그러나 제도권 교회에선 그런 상식적인 물음들이 쉽게 허락되지않았다. 저자의 말대로 설사 누군가 물었다고 해도, “그냥 믿어야 돼, 예수님 말씀은 그냥 믿는 거야 거기에 의문을 던지고 자꾸만 물음표를 달지마. 그건 네 믿음이 약해서 그런거야. 예수님은 인간적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물음을 초월하신 분이야.”라며 봉인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위축되고, 내 안에서 올라온 물음의 싹은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땅속으로 쑥 들어가버리고, 자신이 그런 물음을 던진 것에 대해 묘한 죄의식마저 들어 다시는 그에 대해 묻지 않게 된다”며 “결국 ‘묻지마, 종교’가 되고만다”고 말한다. 저자는 “(기적을) 예수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힘으로만 풀이하면 그리스도교는 ‘물음이 없는 종교’가 되고말아 길이 없어진다”며 “물음을 던질 때 비로서 길이 생겨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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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물음으로 길을 열었다. 기적에 대한 물음의 시작은 ‘악령을 물리친 예수’다. 예수가 갈릴래야 호수 건너편 가라사에서 예수가 벌거벗은 사람 안의 마귀에게 그 몸에서 나와 돼지 속에 들어가라고 한 장면이다. 저자는 성서 속에 그려진 산비탈을 내려 호수가에서 마귀들린 사람과 악령과 돼지와 예수를 만났다. 먼저 마귀나 악령으로 표현되는 악마에 대한 물음으로 만남이 시작된다. 만남을 위한 오작교 구실은 성경이 한다.

 ‘예수가 악마를 처음 만난 곳은 광야였다. 그곳에서 40일 동안 악마와 싸웠다. 악마의 이름은 세 가지였다. 빵과 권력, 그리고 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저자는 “그 악마들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을까” 라고 묻는다. 그는 예수가 앉은 그 자리에서 성서의 구절을 되새김하면서 물었다. 그런 질문의 과정은 기도일 수도 있고, 묵상일 수도 있고, 관상 수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그런 질문에 대해 가슴이 답한 것들을 이 책에 펼쳐냈다.

 ‘예수는 어떤 악마와 싸웠을까. 그렇다.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악마. 그와 싸웠다. 그 악마는 머리에 뿔이 달리고 삼지창을 든, 붉은 빛깔 악마가 아니다. 내 안의 가장 향긋한 욕망, 가장 달콤한 집착, 가장 끈적끈적한 고집. 그것이 바로 악마다. 그것이 신의 속성을 가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게 묵상할 때 마귀 들린 사람과 돼지 떼 일화에서 굳건하게 닫혀 있는 문이 비로소 열린다”고 말한다. 또 예수가 이름을 묻자 마귀가 ‘군대’라고 답한 것에 대해서는 ‘내 안의 욕망, 내 안의 집착, 내 안의 고집 등 수많은 욕망’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돼지떼가 비탈을 달려  내려가 호수에 빠져 죽은 성서 속 사건에 대해서는 ‘천년에 걸쳐 쌓인 두꺼운 어둠이라 해도 촛불 하나 켜는 순간에 사라지고 마는 것처럼 신의 속성을 지닌 예수의 빛의 힘에 의한 것’으로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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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가 유대교 회당에서 12년간 하혈하던 여자를 치유한 기적도 저자는 ‘빛의 힘’으로 본다. 그가 갈릴래아 호수 북부의 마을 카파르나움에 가서 이 장면을 떠올릴 때 하혈하는 여자는 더 이상 3인칭이나 2인칭이 아니다. 저자는 ‘하혈하는 여자를 통해 하혈하는 나를 본다’고 했다.

 ‘저마다 삶의 상처가 있기에 피를 흘린다. 깊은 상처에서는 더 오래 피가 흐른다. 10년, 아니 20년, 30년이 지나도 피가 멈추지 않는다. 그 때마다 의사를 찾아가지만, 오래된 상처는 좀체 아물지않는다. 뿌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게 오래도록 피를 질질 흘리는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은 예수의 겉모습이 아닌 예수의 내면, 즉 예수 안에 깃든 신의 속성이라고 한다. 이런 신의 속성이 닿을 때 마음에 불이 켜지고, 마침내 상처의 뿌리가 무너진다는 것이다.

 

 저자가 예수와 2천년 전 사건을 만나는 건 심안을 통해서다. 심안을 통하지않으면 성서의 구절은 풀리지않은 수수께끼가 너무나 많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구절이 대표적이다. ‘평화의 왕’으로 불리는 예수가 평화를 깨러 온 악당이나 되는 듯이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를 좀 더 근원적인 뿌리로 나아가기 위해 잎사귀를 치는, 즉 ‘진짜 평화’를 위해 ‘가짜 평화’와 ‘착각 평화’를 부순 것으로 본다. 선불교의 임제선사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이고, 권속을 만나면 권속을 죽여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다’고 한 것과 일맥상통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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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마음’을 잠시도 놓치지않고 나아간다. 그 마음의 문을 여는데 불경과 선어록, 노자의 도덕경까지 등장한다. 그는 아무리 예수의 설교를 열심히 듣고, 성경을 열심히 읽어도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마음의 문고리는 안쪽에 달려 있기 때문에, 밖에서 아무리 두드려도 안에서 스스로 열어야만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예수를 만나는데 동원되는 것들은 다양하다. 그는 유대역사서와 그리스어성경까지 동원해 2천년 전의 사건에 대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장면들은 그래서 마치 현재형인듯 생생하다. 그런 생생함으로 물음의 절정인 부활의 산을 넘는다. 그는 과거의 부활이 아니라 현재의 부활이 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를 2천년 전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로 끌어온다. 

 ‘십자가는 욕망의 소멸을 뜻한다. 그래서 예수는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했다.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무너뜨리라고 했다. 그렇게 영적으로 가난해지라고 했다. 그럴 때 비로소 ‘영원’에 거한다고 했다. 태초부터 우리 안에 깃들어 있던 신의 속성 속으로 말이다.’

 

 저자는 예수가 숨을 거두고 묻힌 곳은 골고타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바로 ‘나의 가슴’이라고 한다. 그 뜨거운 아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그는 신의 속성, 빛을 발견하도록 추동하려는 시도를 끝까지 멈추지않는다.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산 예수, 죽은 신앙이 아니라 산 신앙을 원하는 이들이 책의 순례를 거쳐, 성지 순례와 예수 순례를 하고, 마침내 ‘내면의 빛’을 순례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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