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함석헌기념사업회에 내걸린 대형 함석헌 사진 앞에 선 문대골 목사.
‘함석헌의 영적 아들’ 문대골 목사
하루도 허투루 공치는 날 없던 스승
함석헌 일생 <그 32,105일> 책 내
‘무정부주의자 함석헌의 구속’
말년 휴가 때 신문 기사에 가슴 쿵쾅
제대하고 곧바로 자택 찾아가 인연
6·25 때 부모 잃고 고아 떠돌다 군 입대
길거리 장사하며 야간대 청강
연좌제로 취직길 막혀 ‘함석헌농장’으로
<씨알의소리> 김수환 추기경 글 게재
중정 끌려가 밤새 구타 당하고 기절
가까운 사람들 떠나자 ‘나라도…’
“부자 될 수도, 높아질 수도 없는” 삶 묵묵히
육신의 부모만이 부모가 아니다. 육신의 부모를 잃고 영적인 부모를 얻은 이들도 있다. 문대골(77) 목사에게 함석헌이 그렇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인 문 목사가 ‘나의 바푸bapu 함석헌의 일대기’란 부제를 달아 <그 32,105일>(들소리 펴냄)이란 책을 냈다. 바푸란 인도인들이 영적 아버지인 간디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32,105’일은 함석헌이 살다 간 날의 수다. 함석헌은 하루 하루 어느 날도 허투루 산 날이 없다고 여겼기에 그렇게 제목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는 ‘우리 선생님은 공치는 날이 없었다’고 했다.
함석헌은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는데, 문 목사야 말로 고난의 삶을 감당해야 했다. 그는 전남 진도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6·25 때 부모가 사망해 이미 상경했던 큰형을 제외하고 그를 비롯한 5남매는 고아원을 전전해야 했다. 그러다 두 여동생도 세상을 떴다. 소년 문대골은 고향에서 겨우 초등학교를 마치고 고아로 중앙감화원과 목포와 강진, 군산의 고아원을 떠돌다가 17살에 나이를 속이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군대는 훈련은 고되어도 모처럼 안정된 삶을 제공했다. 그는 군대에서 전국육해공군합동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처음으로 존재감을 선보였다.
» 함석헌, 한승헌 변호사(가운데)와 함께한 문대골 목사(맨왼쪽). 문대골 목사 제공
1일1식 하며 기도하듯 노동
그는 제대를 앞두고 말년 휴가를 나와 서울역에서 모든 신문들 1면에 한 노인의 사진과 함께 ‘무정부주의자 함석헌의 구속’이라는 기사를 보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신문과 잡지까지 10여 개를 사서 군으로 돌아간 그는 함석헌에 대한 기사를 제대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제대하는 길로 서울 용산 원효로에 있는 함석헌의 자택을 찾았다. 그는 함석헌이 범접치 못할 위엄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촌 영감’같다고 느꼈다.
그 뒤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엿 장사, 사과 장사, 얼음과자 장사 하면서 단국대 야간 청강생으로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정규학생이 아니었지만 청강생 2학년 때 전국대학웅변대회에서 1등을 해 학내에서 유명인사로 떠올랐고, 당시 학교에서 초청강사로 인기 최고였던 함석헌을 초청해 더 성가를 올렸다. 그는 청강생으로 있으면서 정부의 국유재산 관리요원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런데 합격자 발령장을 받으러 가자 서울국세청장이 고향면장이 보내온 신원증명서를 보여줬다. ‘상기자는 6·25 때 행방불명된 자로, 아버지는 좌익으로 경찰에 의해 사망하고, 큰형은 연희전문대학 재학 중 월북했다’고 적혀 있었다.
연좌제에 걸려 취직길도 막히자 그는 고성군 간성면 산골에 만든 안반덕농장에 들어갔다. 안반덕은 농업과 공동체, 신앙이 함께하는 삶을 꿈꾼 함석헌이 의지가지 없는 사람들을 모아 함께 살려고 만든 농장이었다. 그곳엔 농사도 짓고 소와 닭을 기르며 많을 때는 열 명도 살았으나 그가 머물 때는 3명이 살았다. 함석헌은 한 달에 한 번 와 1주일쯤 머물다 갔다. 함석헌은 새벽에 일어나 묵상하고 밭에 나가 오후 한두 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1일1식을 했기에 아침을 먹지않고 기도하듯 노동을 하던 함석헌과는 편히 앉아 대화를 나눌 시간도 많지 않았다. 함석헌은 가끔씩 한마디를 던졌다. ‘일등하면 뭐 하냐’, ‘밥은 내(가 한) 밥 먹고 살아야 한다’, ‘밥은 같이 먹어야 한다’, 그런 말들은 늘 곰곰이 씹는 화두가 되었다.
» 문대골 목사(왼쪽에서 두번째) 부부가 결혼식 주례를 서준 함석헌 선생과 함께 했다. 문대골 목사 제공.
장준하 사망에 “의문사는 무슨…”
그는 1960년 3월 고향 처녀와 전남 진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함석헌이 그곳까지 내려와 주례를 했다. 함석헌은 진도로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사상계>의 장준하가 보고 싶다며 장준하를 만나고 왔다. 그달 함석헌은 <사상계>에 ’레지스탕스’란 글에서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썼다. 한 청년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바람에 나부낀 휘장이 날아와 못박는 사람과 청년 사이를 가로막더라는 것이었다. 그 청년이 장준하일 것이라고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비서로서 모신 김구처럼 비명에 갈까봐 노심초사했다.
그러다 장준하가 진짜 사망하자 함석헌은 “의문사는 무슨 의문사냐”며 “내가 장준하와 김대중을 만나게 하니 박정희가 죽인 거야”라고 했다고 한다. 함석헌은 장준하가 죽은 뒤 혼이 나간 듯 지내다가 문익환이 국민혁명을 꾀하기 위해 서명을 받으러 오자 그때에야 깨어났다. 문익환이 꾀한 혁명에 함석헌이 첫번째, 홍남순 변호사, 법정 스님이 뒤를 이어 서명했다고 한다.
결혼 뒤 고향 진도에 머물고 있던 문대골은 갑자기 몸이 아파 두 달 입원할 동안 성경을 읽으며 처음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란 생각을 했다. 함석헌이 여자문제로 비난을 받고, 가까운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때였다. 그는 “나라도 선생님을 모시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상경했다. 그는 그때부터 함석헌을 가까이서 모시며 함석헌의 소개로 신학공부를 시작하고, 70년대 후반엔 다시 함석헌의 소개로 민주화의 선봉이었던 기독교장로회 교단 목사가 되었다.
» 함석헌 선생을 모시고 산길을 내려오는 문대골 목사(오른쪽). 문대골 목사 제공
“어지간히 맞아서는 안 죽는다”
문 목사는 1970년 함석헌이 창간해 박선균 목사가 편집장으로 있던 <씨알의소리>에 업무부장으로 함께했다. 저항의식을 불러온 글들이 주류였던 <씨알의소리> 원고를 인쇄소에 맡기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1972년 1월엔 김수환 추기경의 글을 실었다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밤새 구타를 당하고 기절을 하자 중정 요원들이 함석헌의 집 앞에 짐처럼 버리고 갔다. 그런 고초를 이미 수없이 당했던 함석헌은 “사람이 어지간히 맞아서는 안 죽는다”고 했다. 문 목사는 그 순간은 너무 서운했지만, ‘너는 어지간히 맞아서는 죽을 놈이 아니다’란 말로 새겨 들었다고 했다.
문 목사는 함석헌이 그랬던 것처럼 늘 한복 차림으로 꼿꼿한 자세를 지니면서도 부드럽고 겸손하다. 그는 함석헌이 살 때도, 세상을 떠난 뒤에도 늘 함석헌과 함께 했다. 그는 사람들이 함석헌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울 때조차도 함석헌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린 사람이란 믿음을 버린 적이 없다. 문 목사는 “함석헌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도, 일등이 될 수도, 높아질 수도 없었다”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놓은 함석헌의 삶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글·사진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