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무신. 한겨레 강재훈 기자.
세간의 지인들이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사연인즉 종업원들 눈치 보느라 속이 상해 장사를 못 해먹겠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조금 좋은 조건이 있으면 말미도 주지 않고 떠난다고 한다. 기분이 상하다 싶으면 하루종일 까칠한 분위기를 만들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나름의 배려와 그간에 쌓았다고 생각한 정이 무너지면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져 괴롭다고 한다.
고용관계로 보면 갑과 을의 관계인 것 같지만 종업원의 심기를 살피느라 자신들이 오히려 을이라고 한다. 달리 할 말이 없어 옛 사람의 말씀 한 구절을 건넨다. 그러나 그 좋은 말은 당사자에게 잠시의 위로는 되겠으나 해결은 되지 못한다. 갈등은 한쪽이 아닌 양쪽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연을 듣다 보면 이와는 다른 사례가 절로 생각난다. 작년 겨울 이웃 마을 지인의 집에서 두 달여 동안 절임배추 작업을 도울 때의 일이다. 일손이 부족하여 몽골에서 온 부부가 함께 했다. 농촌 일이 그렇듯이 하루 출퇴근 시간 정해놓고 하루 8시간 할 수 없다. 어떤 때는 14시간도 일해야 한다. 그런데도 그분들은 참 건실하게 일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괜찮다고 하며 오히려 주인 아줌마가 힘든 일을 하면 떠맡았다. 부부는 내일처럼 일했고 무엇보다도 늘 웃는 얼굴이었다.
몽골에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어 영상통화를 하며 울 때는 곁에 있는 우리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일이 마무리 될 때 부부의 마음씀이 고마워 계약보다 많은 배려를 했다. 그들이 떠날 때 우리 서로는 가슴에서 솟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 해 겨울은 독한 추위 속에서도 서로가 따뜻했다. 근로조건의 계약을 넘어서 서로를 고마운 존재로 마주했기 때문에 법과 돈으로 살 수 없는 사랑과 행복을 얻은 셈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간은 늘 견해가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다. 그 갈등과 충돌이 다수가 안고 있는 사회문제가 되면 법과 제도로 조정한다. 최저임금법과 임대차보호법 등이 그런 처방이다. 이른바 법과 제도라는 구조적 모순으로 발생한 불이익은 법의 보호로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 과연 법 하나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가 ‘사이 좋은’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비록 법이 미비하더라도 늘 얼굴을 마주하고 사는 사람들끼리 환하게 웃고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일까? 설령 법이 완전하더라도 위로와 기쁨을 주는 가슴이 저절로 열릴까.
지금도 수십 명의 대중이 사는 산중의 수행처에는 주인이 닦지 않았는데도 그 많은 흰 고무신이 깨끗한 모습으로 햇볕에 반짝거린다. 대중은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누가 그 고무신들을 닦았는지 안다. 그런데 그가 많은 고무신을 닦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절집에서는 이런 스님을 밀행보살이라고 한다. 법과 돈이 아니어도 스스로 하는, 부드러운 서로의 손길이 사람 사이를 훈훈하게 한다. 여지가 있는 삶이 필요한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