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왕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 가미가제의 마지막길을 환송하는 일본 여학생들의 모습
아마 초등학교 3 학년이었나 봅니다. 겨울 저녁, 어딘가 초대 받은 집으로 엄마와 손을 잡고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갈
때, 엄마는 어릴 적 일본 선생님에게서 배웠다는 구절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나세바
나로 나세바 나라노 나니고또모…” 노래하듯 엄마랑 반복한 그 구절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니, 아직 빈 도화지 같은 어린 아이들 마음에 뭔가를 심어준다는게 얼마나 책임 막중한 일인지
새삼스럽습니다. 그 구절의 뜻은 대충, “하면 된다, 안되는 것은 안하기 때문이다” 였는데, 어머니
자신이 그 말을 인생의 지표로 삼고 사시지 않았나 합니다. 늘 노력하는 강인한 사람으로 여겨진 어머니는 자신의
힘든 삶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제게도 용기를 주고,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려 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머리가 커지면서 저는 그 말에 커다란 저항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 같은데도 안되는 일들이 생기고, 그런 경험은 늘어나기
마련이고, 또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니까요. 원컨
원치 않건 우리는 온 세상과 그물처럼 연결돼있는데, 어떻게 한다고 다 됩니까? 안되는
건 다 내가 안했기 때문이라고? 부족한 것은 늘 나라고? 나의 최선이
남의 밑 닦는 종이 정도로 여겨지는 일들도 허다한데? 이 말은 격려를 넘어서, 안되는
것은 되게 만들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무자비한 타협을
종용하기 까지 하며, 소위 성공이나 출세를 못한 자신과 남들에게 야박하고 은근한 경멸의 시선까지 던지게 합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거동을 못하고 누워계실 때, 만약
환생이 있다면 누굴 다시 만나고 싶냐고 여쭈었더니, 엄마는 그 선생님의 이름을 얘기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다른 일본인 선생들과 달리 그 분은 엄마를 늘 격려하고 용기를 줬다고요. 엄마의
기분을 돋구기 위해, 아직도 그 선생님의“나세바 나로…”를 외우고 있는데, 제대로 기억하는거냐고 묻자, 엄마는
눈을 감아버리고 못들은 척 하셨습니다. 의외였습니다.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왼쪽 전신의 마비를 극복하려고 일년간 부단한 노력을 하셨지만, 다시는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던 엄마에게, ‘하면 된다. 안되는 건 안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반가울 수가 없지요. 나중에서야 든 생각이지만, 엄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을 알아주고 격려한 선생님의 마음이었지, 그 구절
자체가 아니었던 겁니다. 한편, 그 선생님만큼 자신을 인정해주고 다독여
준 사람이 다시 없었다는 말도 되니, 그 마음을 몰라드린 것이 참 아픕니다. 이제는 더이상 어머니께 여쭐 수 없으니, 자주 가는 카페
주인의 일본인 아내에게 음으로만 알고 있는‘나세바 나로...’를 좀
검색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구절은, 절대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던
일본군국주의자들이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국민통합을 위해
유포하던‘훌륭한 시’ 중의 하나로 쓰였던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던‘카미카제’의
발상은,‘안되는 것은 안했기 때문’이라는 그들 스스로의 도덕적 경멸을
면하기 위한 마지막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지난 70여년간, 이런 군국주의적 도덕관념은 아직도 우리 위에 긴 그림자를 던지면서, 무지막지하게‘되게 만드는’ 뒤틀린 행동을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이제‘나세바 나로…’는 겨울날의 어두운 골목길과 따스한 엄마의 손과 목소리만으로 남아있지만, 우리가
쓰는 일상의 언어 속에, 모든 조직 속에, 아이들의 놀이터에까지 일제와
군사독재의 잔재는 여전히 살아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 화학비료로 죽어버린 땅을 살아있는 유기농토로 바꾸려면
몇 해가 걸린다고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바꾸는데는 더 오래 걸리지요. 그래도
살아 숨쉬려면 독을 계속 걸러내는 수 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