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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서의 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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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성경 읽기 

[복음과상황 273호 커버스토리] 
2013년 07월 19일 (금)  김근주 
goscon@goscon.co.kr 
 
 
어릴 때부터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고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런데 공산주의의 반대말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이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비교하는 것은, 마치 ‘나는 지혜로운데, 너는 남자잖아’ 식의 그릇된 범주 비교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資本主義, capitalism)이다. 한자말로 ‘자본이 중심인 사상’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오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는 기독교인들이 자본주의에 크게 반발할 것 같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것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런데 비슷한 방식의 표현이지만 특이하게도 기독교인들이 대단히 싫어하고 거부하는 표현으로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번역되는 ‘휴머니즘(humanism)’을 들 수 있다. 말을 풀자면,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던 대부분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인본주의’에 대해서는 사탄의 대명사쯤으로 생각하여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거부하고 공격한다는 점이다. 이런 모순적인 태도를 한 마디로, “자본이 주인이 되는 것은 크게 상관없는데, 사람이 주인이 되는 꼴은 못 보겠다”라고 할 수 있겠다. 정작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대신해 버리는 것으로 ‘재물’(헬라어로 ‘맘몬’)을 언급하셨지만(마 6:24), 오늘 우리 교회는 ‘자본주의’보다는 ‘인본주의’가 훨씬 더 무섭다고 여기는 셈이다.

 

예수와여자.jpg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휴머니즘’
기본적으로 휴머니즘은 사람을 모든 관심의 초점과 중심에 두는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고백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이로서는 ‘사람이 모든 관심의 초점이요 중심’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릴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중심에 내세우는 것에 대해 사실 우리는 못내 불편한 마음이 있다. 무슨 모임을 하건 어디에 가건 아무리 살벌하고 거센 이야기들이 나왔다 하더라도,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고 ‘은혜롭게’ 마무리해야, 모임을 제대로 한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뭐랄까, 하나님을 먼저 높이고 경배하지 않으면 속이 개운치 않다고나 할까.

마태복음 22장은 예수님을 찾아온 한 율법학자를 소개한다. 그가 예수께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 여쭈었을 때, 예수께서는 “온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전체가 마음과 목숨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자신 같이 사랑하는 두 가지 계명에 근거하고 있다고 명쾌하게 답하셨다(마 22:34?40). 예수님은 구약 전체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것이다. 구약 전체에 대한 예수님의 또 다른 요약은 마태복음 7장에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내용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구약을 두 계명으로 요약하실 때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주님께서 구약을 한 마디로 요약하실 때에는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것이다. 구약 전체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압축하셨다는 점에서, 오늘 어떻게든 하나님을 높이기 원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요약은 파격적이다. 주님은 ‘휴머니스트’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바울에게서도 볼 수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갈 5:14)

 

이에 따르면 율법으로 대표되는 구약의 요체요 핵심은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님과 바울의 구약 요약은 종교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은 예수를 믿건 믿지 않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누구라도 이 말씀처럼 살기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더구나 경쟁을 가장 중시하며 승리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세상에서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며 살기는 정말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됨은 남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기독교적 용어들로 가득 찬 표현들에서 나타난다기보다는, 누구나 이해하고 납득하고 동의는 하지만 정작 지키기는 버거운 진리를 정말 지키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하여 기독교 신앙은 숨겨진 비밀을 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알지만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여기는 진리를 실제로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 믿는 신앙을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말로 표현해 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구약 신앙은 이웃 사랑으로 압축할 수 있고, 이를 일반적으로 표현하자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기조로 하는 ‘휴머니즘’은 우리 믿음의 본질과 잇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휴머니즘 반대는 신본주의? 자본주의!
그러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웃 사랑)으로서 휴머니즘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위키 사전(Wikipedia) 한국어판에서 인문주의 혹은 인본주의의 반대말을 ‘신본주의(헤브라이즘)’라고 풀이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구약 신앙을 가리키는 표현일 것 같은 헤브라이즘이라는 말은 그 정체를 규명하기 어려운 말이다. 그리고 유대인이었던 예수님과 바울이 구약의 핵심을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헤브라이즘을 휴머니즘에 반대되는 신본주의라고 여기는 것은 적절치 못한 연결이다.

여기서 오히려 문제는 ‘신본주의’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인본주의’에 대응하여 우리 교회가 굉장히 선호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신본주의인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면 신본주의인가?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귀히 여기며 사랑하라’였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이야말로 신본주의의 핵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요일 4:8).

그러므로 휴머니즘의 반대말은 ‘신본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휴머니즘의 반대말은 사람보다 자본이 최우선되는 자본주의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이유가 이윤 추구라는 점에서, 그 안에 사람이 설 자리는 거의 없어 보인다. 기껏해야 이윤 추구의 목적에 영합하고 부합될 때에만 인간의 존재가 의미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은 오직 ‘쓸모’로만 평가된다.

 

자본주의 체제와는 관련이 없지만, 사람의 존재 이유를 오직 ‘쓸모’로만 여긴 사례를 사무엘상 30장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이 잠시 그의 터전이던 시글락을 비운 사이에 아말렉이 쳐들어와서 사람과 물품을 모두 약탈하여 떠났다. 모두가 낙담하여 도리어 다윗에게 그 분노를 표출하려고 할 때,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모두를 추스려 아말렉을 추격한다. 그러나 여러 날 계속되는 싸움으로 인한 피로에 지친 이들 가운데 이 추격전에 제대로 함께하기 어려운 이들이 속출했고, 다윗은 그들을 쉬게 한 채 추격에 임하였다. 다윗의 무리들은 광야에서 쓰러진 채 다 죽어가던 애굽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아말렉을 뒤쫓느라 일분일초가 다급한 상황인데도 이 소년을 돌보고 먹이어 기력을 회복하게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소년은 원래 아말렉에게 속했었으나 병들어 쓸모없게 되자 곧바로 버림 받았고, 그 이후 사흘 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하여 거의 죽게 된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 소년의 도움으로 아말렉이 간 길을 알게 되어 다윗의 무리들은 마침내 모든 것을 다 회복할 수 있었다.

 

여기서 다윗의 무리와 아말렉의 차이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차이는 쓸모없어진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다. 어찌 보면 전쟁에서 병들어 쓸모없게 된 이는 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다급한 상황에도 버려져 죽게 된 소년을 돌보는 다윗 무리의 모습은 새로운 세상을 담고 있다. 하나님을 믿음과 우상을 믿음의 차이는 그들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쓸모없어 버려진 존재에 대한 대우였다. 다윗의 무리에게는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에 대한 긍휼,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를 돌보고 살핀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나 그를 돕는 이나, 종교나 신앙 이전에 사람 자체가 가장 중요하고 핵심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아말렉으로부터 모든 것을 되찾아 돌아온 다윗은 승리의 전리품을 나눌 때에, 도중에 지쳐 추격전에 함께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같은 몫이 돌아가게 한다. 힘이 있어 싸운 사람이나, 지쳐 싸우지 못한 이들이나 동일한 몫이 분배된다. 이것은 새벽같이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한 사람과 마치는 시간쯤에 들어가서 일한 사람에게 동일한 품삯을 지급하였던 포도원 주인을 떠올리게 한다(마 20:1?16). 다윗에게 그리고 포도원 주인에게 사람의 쓸모는 그의 재능이 아니었다. 그가 사람이기에 살아야 하는 것이고, 사람이기에 그에게 필요한 몫이 분배되어야 한다. 개인의 재능이 각자에게 돌아갈 몫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재능은 각자가 힘을 다해 수고하고 애쓸 분량을 결정하는 것일 뿐이며, 몫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배분된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세상은 이윤 추구가 최고최대의 목적인 자본주의와 부합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 수 없는 존재로 ‘재물(Money, mammon)’을 언급하신 것 아닐까.

 

인문학, 사람에 대한 공부
휴머니즘이 사람에 대한 애정이라면, ‘인문학(Humanities)’은 사람에 대한 공부라고 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능한 가지지 말도록 교육받아왔다. 누군가 철학을 공부한다면, 대부분 “그거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래?” 혹은 “너 먹고 살기 힘들겠구나”라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너 아직 철이 덜 들었구나’라는 식의 눈빛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우리네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역사 과목이 점점 약화되어 가는 흐름 역시 인문학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모습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학문을 평가하는 핵심적인 기준이 ‘쓸모’와 ‘돈벌이’인 한, 인문학은 설 자리가 없다.

문학과 역사, 철학으로 대표되는 인문학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이며, 사람다움이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생각하게 한다. 비슷한 듯하지만, 조금 차이가 있는 과목으로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과목들을 보자. 이 과목들은 규범적인 내용,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 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해야 하는 규범을 가르친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 과목들은 당시 사회가 요구하고 원하는 인간형을 길러 내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이 시간에 독재정부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내용들이 가르쳐지고, 권위에 순종하고 질서를 지킬 것을 반복적으로 교육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 마디로 체제와 기득권의 유지에 가장 중요할 수 있는 과목이 도덕이나 윤리였을 수 있다.

그러나 도덕과 윤리의 근본은 사람다운 삶에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사람 자체에 대한 관심과 고민, 모색을 다루는 분야가 되어야 한다. 인문학은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삶에 대해 정답을 일러주는 학문이 아니라, 그에 대해 생각하고 사색하고 고민하도록 이끄는 학문이다. 달리 말해 사람됨에 대해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사색하는 힘을 튼튼하게 만드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고 사색하는 능력이야말로 사람다움의 본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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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서의 성경 공부
성경을 읽는 것은 어떨까?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주게 될까, 아니면 정해져 있는 정답들을 익히고 암기하고 주입하는 쪽일까? 하나님 말씀에 아멘으로 응답한다는 것이 선포되는 말씀을 아무런 의심 없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일까? 성경 공부는 문학과 역사와 철학 공부에 가까울까, 아니면 체제를 전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로서의 도덕과 윤리 시간에 가까울까? 인문학적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바울이 전도 여행하는 중에 들렀던 곳 가운데 베뢰아가 있다. 사도행전은 베뢰아 사람들을 가리켜 ‘너그럽다(noble)’고 표현한다(행 17:11). 이 표현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기본적인 의미는 ‘기품 있다’ ‘고귀하다’이다. 어떤 사람이 기품 있고 고귀한 사람인가? 사도행전 17:11은 베뢰아 사람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표현한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이 전하는 내용을 들었다. 여기서 ‘말씀을 받았다’ 하여 전부 다 믿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이들이다. 그런데 바울이 그 소식을 전할 때에 베뢰아 사람들은 냉소하거나 조소로 대응한 것이 아니라, 간절함, 진리에 대한 간절함으로 바울에게 귀를 기울였다. 쉽게 믿어서 고귀한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진지함’이라서 고귀한 것이다. 품위 있는 행동거지와 품위 있는 집안 배경이 우리를 기품 있게 만들지 않는다. 사람의 진정한 기품은 ‘진리에 대한 진지함’에 있다.

베뢰아 사람들은 그들이 바울에게 들은 내용이 과연 그러한가 따져 보았다. 개역 성경에서 ‘상고하다(examined)’라고 옮긴 헬라어 단어 ‘아나크리노’는 다른 곳에서 ‘의심하다’(행 11:12), ‘질문하다’(고전 10:25) 등의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니 바울이 전한 말씀을 쉽게 밎지 않고 정말 그런지 이리저리 따져보고 의심도 하면서 성경과 비교하여 검토하는 비판적 사고가 베뢰아 사람들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의심하고 따져보고 문제 제기하는 것은 믿음 없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진리를 찾고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한 모습이다. 덮어 놓고 믿게 만드는 것은 시장터의 야바위꾼뿐이다. 쉽게 믿지 않고 회의(懷疑)하며 질문하는 베뢰아 사람들의 비판적 사고야말로 그들의 고귀함, 기품의 근거이다. 질문하는 인간은 존귀하다. 회의하는 인간은 존엄하다. 사람답다.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질문하는 것이다. 실제로 성경의 많은 부분들은 가치 판단이 명확히 내려져 있지 않은 채 우리에게 전해졌다. 아브라함이 애굽에 내려가서 부인을 누이라 속인 일이 올바른 행동인지, 요셉이 형들의 잘못을 부모에게 말한 것이 타당한 행동인지, 에스라가 이방 여인과 결혼한 가정을 모두 헤어지게 만든 것이 정당한 조치인지, 궁금하면서도 그리 쉽게 판정할 수 없는 내용들이 성경 안에 수두룩하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 본문들을 판단할 것인가?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고 서로 나누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문이 당시 상황 속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진지하고도 신중한 공부가 필요할 것이며, 그 말씀을 적용할 우리 현실에 대해서 역시 신중한 통찰이 필요하다. 그러니, 과연 그러한가 비판적으로 읽어가는 것은 성경을 파괴하는 읽기가 아니라 사람다운 읽기이다.

 

시편 73편의 ‘고민하는 인간’
그러나 손쉬운 정답이 난무하는 우리 교회의 풍토는 이미 우리 사회를 향해 대답할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 같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감감하지만, 출발은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일 것이다. 그러니 언제든 질문하고 따져보고 고민해야겠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인간형의 대표적인 모습을 시편 73편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선이시다(God is good!)’는 것은 구약 신앙의 근본적인 기둥이다(시 73:1).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더라는 점이 시편 기자의 괴로움이다. 현실에서는 악인이 ‘샬롬’을 누린다(시 73:3).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 대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 자신이 마음이 차분하고 평안하기는커녕, 도리어 이 악인을 시기하는 마음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인데, 부럽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죽을 때에는 악인들이 후회 가득한 절망의 말을 외쳐야 하는데, 시편 기자가 보니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평생 강건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나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한 마디로 사람 같지 않은 존재였다(시 73:5). 그에 비해 시편 기자는 하루하루가 재난이며 고통이었고, 그토록 마음을 졍결하게 유지한 것이 허사였다(시 73:13?14). 그러니 세상을 휩쓰는 것은 악인의 가치관이었다(시 73:9?11).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것이고, 꿩 잡는 게 매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이 하나 틀리지 않았다.

이 실존적인 고통을 시편 기자는 어떻게 극복하는가? 73편은 양식으로 분류하면 ‘탄식시(lament)’에 해당한다. 인생에서의 곤고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탄식시의 기본 형태이며, 이러한 양식의 시들은 대개 탄식―신뢰 고백―간구―찬양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시편 73편이 다른 탄식시와 구별되는 특별한 점이 있다면, 하나님을 향해 도우심을 구하는 ‘간구’ 부분이 없다는 사실이다. 탄식에 이어서 ‘주여 구원하소서’ 혹은 ‘나를 건지소서’와 같은 간구가 와야 할 텐데, 그 간구 대신 시편 기자의 숙고와 깨달음이 담겨 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

 

그는 이 현실을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울 정도로 사색한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당연히 기도를 하거나 제사를 드리러 나아가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귀한 깨우침을 주셨을 수 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표현한다. 심사숙고하고 사색하며 성전에 나아갔을 때, 마침내 의인과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시편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언급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 버리지 않는다. 그는 고민하며 사색하며 깊이 생각한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아무런 기적도 초자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야말로 복’임을 깨닫는다(시 73:28). 물론 여전히 그의 삶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짐승” 같고(시 73:22) 악인은 번성을 누리겠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계획을 깨닫고 확신하게 된다. 이러한 시편 기자의 깨달음과 확신이야말로 ‘인문학적 사색의 승리’라고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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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시간을 마련하는 것
루터가 그랬다던가. 너무 바쁘기 때문에 더욱 기도한다고. 시편 73편 기자가 성소에 들어갈 때 진리를 깨닫게 되었듯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진리를 향한 사색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있어야 무엇인가를 차분히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세상을 지배하는 권세는 분명 우리를 잠시도 쉬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스스로 마음이 바빠서 차분히 앉아 있지 못하게 할 것이며, 세상의 구조를 장악하여 우리로 하여금 쉴 새 없게 만들 것이다.

이 땅의 청년들은 그야말로 쉴 새 없다. 빚을 갚고 생활하느라 도무지 가만히 무엇을 읽고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독서량이 떨어진다지만 도무지 독서할 시간과 여건을 만들어 낼 수 없게 세상이 몰아치고 있다. 잠시라도 가만 두면 딴 생각을 하게 되니, 이 세상은 우리로 쉬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람에 대해 공부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쉴 새 없게 만드는 이 땅의 착취와 억압의 구조에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분주함에 쫓겨 다니지 말고 분주함 속에 차분히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네 신앙 선배들이 그 바쁜 와중에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고, 새벽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생각해볼 만하다. 새벽 미명에 깨어 있어 기도하며 생각하고 나와 이웃을 돌아본다. 그럴 때 사람들의 평판으로부터 벗어나 참으로 가야 할 옳은 길을 주님처럼 걷게 될 것이다.

바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그래서 생각 좀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야겠다. 멈추어 서서 곁에 있는 동료의 안색도 살펴야겠고, 나와 동료를 이렇게 휘몰아치는 세상에 대해 고민 좀 해봐야겠다. 이 현실에 대해 성경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질문하고 따져봐야겠다. 그리고 어떻게 거대한 자본의 힘에 함께 맞설 수 있을지 동역자들을 만나봐야겠다.


김근주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신학교에 가게 되었고, 결코 상상해 본 적 없는 목사가 되었다. 예언자들이 외치는 심판뿐 아니라 회복의 메시지야말로 예수께서 이 땅에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알짬임을 깨닫고, 이를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한다. 소망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는 연구나 준행, 가르침 모두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서울대, 장로회신학대학원,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느헤미야 팟캐스트 1: 세습 목사, 힐링이 필요해?》(공저), 《이사야가 본 환상》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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