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레네산맥 스페인 보리사 인근 포행길
날이 맑으면 멀리 산들 너머로 지중해가 보이는 피레네산맥 자락에 ‘보리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한국의 무상사에서 10년간 스님으로 있던 체코 출신의 톤다와 바르셀로나에서 그래픽디자이너로 일하던 바르바라는, 도시의 사람들에게 자연 속에서 묵언할 수 있는 수행터를 제공하고 싶다는 공통의 꿈을 갖고 있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자취라고는 농부들이 떠나버린 빈 집 두 채 뿐인 외진 산골에서, 그 중 한 채를 세내어, 바르셀로나의 도반들과 함께 조금씩 수리해 가며 수행처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경치가 빼어난 산 속에 수도원이 있는 것은 유럽에서도 낯설지 않지만, 농가였던 보리사는 정말 소박하고, 법당은 돼지우리를 깔끔히 개조해서 씁니다.
» 참선수련회를 끝낸 참가자들. 맨 오른쪽이 필자 이승연 독일 심리치유사
3년 전, 편안한 마음으로 어머님의 49재까지 지냈는데, 갑자기 겉잡을 수 없는 허전함이 몰려왔습니다. 산에 가면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바위와 물이 어우르고, 산세가 부드럽고 침엽수로 컴컴한 숲이 아닌 밝은 산, 말하자면 한국의 산과 비슷한 산이 어디일까 찾았습니다.
제게 우리나라의 산은 ‘정복’하고 싶은 산이 아니라, 그 품에 안기고 쉬고 놀고 싶게하는 산입니다. 하나 더 중요했던 점은, 남들과 있되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지요. 보리사는 그런 제 욕구에 가장 잘 맞는 곳이었고, 그렇게 보리사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그 산 속에서 저는 다섯 살과 여덟 살의 제 어린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린 제 눈 앞에서 졸도하며 쓰러지는 엄마를 목격한 후로 엄마에 대한 걱정은 그 산 만큼이나 거대한 마음의 짐으로 50년 이상 자리잡고 있었던겁니다. 어머니보다 20년이나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가 편안하고 담담한 모습으로 나타나, 이젠 네 걱정이나 하면 된다고 저를 위로하시는 목소리를 들으며, 목을 놓아 울었습니다. 그토록 힘겹게 느껴진 허전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고나니, 마음은 다시 가볍고, 밝고, 이렇게 자연 속에서 묵언하며 지낼 수 있는 터를 마련해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들이 너무나 빠르게 우리를 생각의 태풍으로 몰아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시시각각 떠오르는 생각을 말로 내뱉아 버리지만 않아도, 마음 속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태풍이 몰아치면 강은 위아래 없이 뒤죽박죽이 되고 흙탕물 속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지요. 바닥에 있던 것들이 들고 일어나 빠른 속도로 휩쓸려 갑니다. 하지만 바람이 잦아들면 떠내려 간 것들은 모여서 쓰레기섬을 만들고, 가라앉을 것들은 가라앉아 물은 다시 맑아지고 바닥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지요. 이런 생각의 바람을 잠재우고, 마음의 바닥에 있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볼 수 있기 위해 우린 발길을 멈추고, 말을 멈추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