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조현, 이병남, 정명숙, 이죽정, 이재돈 신부
어제밤 특별한 만찬을 즐겼습니다. 최후의 만찬 아닌 최초의 만찬이자 최고의 만찬이었지요. 서울 성북동 최순우옛집 바로 옆집에 초대를 받아갔는데요. 그 집은 몇달 전까지 명동성당 부근에있는 백병원 앞에서 죽향이란 죽집을 25년간 하다 최근 그만둔 정명숙씨와 그의 모친 이죽정 여사 둘이 사는 단독주택입니다.
두 모녀는 한글날 휴일날 저녁, 죽향 25년 역사에서 가장 고마웠던 손님 셋을 자기집으로 초대했는데요. 신라호텔 주방장이 요리를 배워갔다는 '숨은 고수'이죽정 여사가 옥상 텃밭에서 기른 채소로 해준 요리들이 어찌나 맛나던지요.
그러나 그 무엇보다 맛난건 두 모녀의 정성과 오랜 단골을 잊지않고 집에까지 초청해준 마음씀씀이였지요. 죽향은 죽이 대표적인 음식이지만, 비빔밥이나 국밥도 맛있었고, 밤엔 술안주가 될만한 요리들도 했지요. 그런데 죽향이 다른 음식점과 다른건 밑반찬까지 모든 음식을 직접 만든다는 거였죠. 요즘 밑반찬들을 거의 중국에서 만들어들여와 식당에서 포장만 뜯어 차리는 많은 식당들과 달랐죠. 그것도 조미료를 쓰지않고. 요리를 한두개만 시켜도 덤으로 퍼주면서도, 술은 조금만 먹게 권유했죠.
허나 그보다 더 죽향다은건 죽향은 사실상 밥상공동체였어요. 주인과 손님이 어울려 삶과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털어놓고 경청하고 울고 웃던 곳이었지요. 각기 따로 온 사람들도 주인장의 소개로 합석하기도하면서 말이지요. 저는 무엇보다 좋았던건 저녁에 벗들이나 신문사 동료들과 그집을 갈때 몇시에 몇명쯤 간다고만 얘기하지 무슨 음식을 해달라고 주문해본적이 없어요. 주인장은 어떤 사람들이 오느냐에 따라 취향대로 요리를 내놨는데, 데려간 사람들마다 넘 좋아했지요.
» 2008년 조현 저 <울림> 출간을 기념해 죽향에서 열린 조촐한 파티에 함께 한 도올 김용옥(왼쪽 두번째)선생 등 참가자들
1층이 아닌 2층에 있는데도 단골이 끊이지않는건 이런 집이어서였지요. 저녁 자리가 10시가 넘어 주방 아줌마들이 퇴근할 시간이 되면, 단골손님들이 미안해하며 자리를 다른곳으로 옮기려하면, "왜 돈을 쓰려고하느냐.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여기서 얘기하고, 술을 더 마시고 싶으면 냉장고에서 꺼내 먹고, 문만 잠그고 가라"면서 자기는 퇴근을 합니다. 그러니 단골 손님들이 좋지않을 수가 없지요.
죽향은 영락교회 앞이어서 영락교회 신자들도 많이 오지만, 명동성당에서 신부 수녀들이 많이 왔지요. 싱글인 정 사장은 동변상련인지 독신수도자들인 신부나 수녀, 스님들에겐 공짜 밥도 잘 대접하고 각별하게 챙기기도 했지요. 그 뿐이 아니었지요. 어르신들도 잘 모셨는데, 리영희 선생님은 이곳을 너무 좋아해, 일본인들에게 이 죽집을 소개하는 일본어글을 써서 일본잡지에 실리게도 하고, 돌아가실 때도 이 죽집 앞에 백병원에 몇달간 입원해 계신 것도 이 집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저도 죽집에서 리영희 선생님과 자주 만났지요. 리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5~6개월 전쯤엔 제가 오지 암자를 기행하고 쓴 <하늘이 감춘 땅>을 읽어보시곤 밥을 사주시겠다고 죽향으로 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편찮으신 몸으로도 오지 암자 수행자들에 대해 궁금해하시면서 한군데라도 꼭 가보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야말로 죽향은 공동체였어요. 정명숙 사장은 1993년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여성원정대 부대장으로 참여한 산악인인데 그 뒤 죽향을 시작했지요. 그 분과 인연이 된 건 2004 제 인도 기행서인 <영혼의 순례자>(<인도오지기행>으로 재출간)를 읽고는, 저를 죽향으로 초대했습니다. 책을 감명 깊게 읽고 자기 집에서 지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 거였지요.
» 이재돈 신부에게 포도주를 따라주는 이죽정님
이날 단골로 소개 받은 이병남 서강대명예교수는 제 첫책인 2001년 <나를 찾아 떠나는 17일간의 여행>(<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으로 재출간)을 읽고, 제 신문사 선배를 통해 만나고싶다고 연락이 와서 보게 돼 인연을 맺었지요. 그 분도 늘 죽향에서 만났는데, 두 분 다 제 책을 보고 연락을 해온 펜클럽 회원이라고 말하며 웃곤했지요. 그 이후 제 책을 내고 난뒤 출판기념회식의 조그만 파티도 열댓명이 들어가는 죽향의 방에서 하곤했지요.
이날 초대받은 또 한분은 가톨릭 서울대교구 환경사목위원장을 한 이재돈 신부. 이 분은 이병남 교수의 고교와 대학 친구이기도 한데, 이 교수와 제가 이 집을 드나들기 훨씬 전 1990년대부터 이 집 단골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명동성당 신부들에게 이 집이 인기였지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않은 독신수도자들에게 늘 부담없이 식사하고 한잔도 할 수 있도록 잘 해줬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신부님이 몇년 그 집에 다니다 5년간 미국으로 유학을 간적이 있는데, 그 때 정사장 어머니 이죽정님에게 "5년간 못뵐 것 같다"고 하며 인사를 하고 나가자 이죽정여사가 눈물을 쏟고 말았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자기 나이가 많아서 5년 뒤에 살아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눈물이 쏟아졌는데, 이 신부도 뒤돌아보더니 눈이 빨갛게 붉어오더라는 것입니다. 80이 넘은 이죽정 여사는 이 신부와 그 인연을 나누며 10대 소녀처럼 다시 수줍게 웃었습니다.
이 신부는 죽향이 다른 분에게 인계된 뒤 명동성당 신부들이 아지트를 잃어버려 방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병남 교수와 저도 마찬가지라고 동변상련의 아픔을 나눴지요. 그랬더니, 이 성북동 가정집에서 단골들만을 모시고, ‘성북동죽향’을 해보면 어떠냐는 애기가 오고갔고, 두 모녀는 "25년간 인연을 맺은 정든 분들을 못뵈니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며 "정말 그래볼까 싶다"고 말했습니다.
돈만이 오고가는 집이 아니라 이렇게 사람의 정과 정이 오가는, 공동체적 밥상공동체가 끊어지지않고, 곳곳에서 되살아나면 좋겠습니다. 모녀는 늘 그랬듯이 옥상정원에서 키운 채소를 넣어 정성스레 논미꾸라지를 끓인 추어탕을 팩에 담아 돌아가는 손에 들려보냈습니다. 마치 엄마처럼, 누이처럼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