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cast
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3077

철저히 삶에 뿌리내린 공부

$
0
0

 

"삶과 관념의 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복음과 상황 273호 커버스토리] 아름다운마을공동체 최철호 목사 인터뷰 


 2013년 07월 19일 (금) 이범진  poemgene@goscon.co.kr  
 
 

편집복음과상황최철호목사.jpg   
최철호 목사. ⓒ복음과상황 이범진

 

180여 명이 함께 사는 아름다운마을공동체(대표 최철호 목사)는 20년 넘는 세월 속에서 일구어진 생활 예배·운명 공동체다. 아름다운마을공동체는 ‘삶’을 구심점으로 성경과 인문학의 건강한 관계를 추구하고 실험해 왔다. 이 공동체 부설 ‘기독청년아카데미’(기청아)에서 진행되는 성서, 철학, 역사 등의 인문학 공부 과정은 부단한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물이다. 성경, 인문학, 삶의 온전한 관계를 위한, 최철호 목사의 치열한 고민이 낳은 결과다. 비가 많이 내리던 7월 8일, 아름다운마을공동체가 운영하는 찻집 ‘마주이야기’에서 최철호 목사를 만났다.

 

 

아름다운마을공동체와 기청아에서 인문학 공부 과정을 오랫동안 꾸려왔다. 성경과 인문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입장에서 이런 고민은 더 깊었겠다.

그렇다. 공동체에서 인문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그런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제는 질문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성경과 인문학 중 무엇을 우위에 둘 것인지, 어떻게 교차시켜야 할 것인지, 이런 질문들은 사실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삶의 특정한 영역(역사, 철학, 문학 등)을 추상화시킨 것이 인문학이고, 삶을 신학적 언어로 추상시킨 게 성경이고 신학이다. 추상적인 것들끼리 우위를 논해 관계를 설정하거나 교차를 시도하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소모적이다.

 

그렇다면 인문학과 성경, 어떻게 접근해가야 할까.
추상화된 것들을 실제 삶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내 삶에서 의미 있게 소화시켜야 한다. 인문학이나 성경이나 실제 삶으로 내려오면 똑같다. 나의 일상생활이나 고민과 닿아 해석될 때 추상적 세계에서 만나지 못했던 성경과 인문학이 비로소 마주해 삶으로 녹아든다. 인문학과 성경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름다운마을공동체와 기청아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공동체와 기청아에서는 다양한 학문을 제한 없이 공부한다. 《기독교강요》와 같은 조직신학에서부터 역사신학, 민중신학, 그리고 동서양의 고전도 같이 읽는다. 《동의보감》이나 동학, 홍역학 등 조선말기의 창조적 사상운동을 읽기도 한다. 자신과 공동체가 경험한 하나님 사건을 다양한 분과 학문, 창조적 사상운동의 언어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다양한 삶의 정황과 관심을 지닌 공동체 지체들이 종교적 언어만이 아니라 자기의 언어로 삶을 이해하고 해석함은 주체성과 창조성을 고양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삶과 인문학을 연결시키는 능력의 고양은 공동체에서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나.
크게는 세상 정사와 권세, 시대의 우상이 강제하는 삶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새롭고 대안적인 삶의 양식을 함께 만들 때 매우 큰 유익이 되었다.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현장, 그 현장의 언어로 삶을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을 때, 생활영성은 더욱 깊어진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식의주락 생활양식, 교육, 소비, 생태 등의 현장에서 대안적인 삶을 만들어가는 데 큰 자산이 되고 있다.

 

삶과 치열하게 연결될 때에라야 인문학이든 성경이든 의미가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학문들이 파편화되고 신앙과 인문사회과학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모두 ‘삶’을 상실한 채 학문하기 때문이다. ‘삶을 상실한 인문학’을 성경 해석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를 키울 뿐이다. 성찰을 거치지 않은 근본주의적 성경 해석도 문제지만, 삶을 상실한 인문학 또한 큰 문제를 일으킨다. 신학과 인문학이 다루는 ‘관념’이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해석하고, 다시 삶이 관념을 추동하는 ‘삶과 관념의 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최근 나타나는 인문학의 유행에서는 그런 생기 있는 순환을 찾기 어렵다.
 
요즘 인문학에 관심이 높아지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인가?
부정적 맥락을 더 주목하고 있다. 제대로 된 길로 갔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상품화에 익숙한 이들에 의해 인문학은 또 다른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지식인들의 뿌리 깊은 사대성이 대중에게 확산된다. 새로울 것 없는 외국 학자들 이름과 인용문으로 짜깁기 된 논문과 책들, 자기 삶과 괴리된 관념을 다루는 인문학 운동가들에게서 위기의 징후를 보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사대성’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대표적으로 삶이 결여된 채 외국 학자들의 권위를 빌어 논문을 쓰면 인정을 받는 세태다. 한국은 유치원 때부터 삶과 괴리된 공부를 한다. 기본적으로 학습 문화가 그렇다. 삶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학습으로 성과를 내도 칭찬을 받고, 학위를 따고, 인정받는 구조다. 사대주의가 만연하다. 사대성은 주체성이 말살된 것이고, 주체성이 말살된 사유에서는 창조적 사유와 삶의 대안을 기대할 수 없다. 주체성이 말살된 인문학 열풍을 우려하는 이유다.

 

교수를 비롯한 제도권 지식인들이 이끌어가는 인문학에는 ‘삶’이 결여되었다고 보는가.
한국의 학습 문화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다. 대학생 때 다른 학교를 찾아다니며 여러 교수들을 만나서 묻곤 했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자기 영역이 아니면 ‘전문가가 아니다’며 대답을 회피했다. 파편화되고 추상화된 학문은 삶과 결여되기 쉽다. 삶의 자리를 떠난 고도의 추상화를 학문이라 생각해온 분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는 인문학 운동은 허상이다. 인문학을 상품화하고, 사대성을 확대?재생산할 뿐이다. 한국의 지성인들은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지나치게 사대적이다. 거의 정신적 질병 수준이다.

 

그 점이 기청아 강사를 섭외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될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아무리 교계와 학계에서 인정받는 전문가라 할지라도 삶과 결여된 학문을 하고 있다면 섭외하지 않는다.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섭외하지 않는다. 해당 분야에 자기가 최고 전문가인데 기청아에서 안 불러준다고 서운해 하는 사람도 있다 들었다. 우리 기준에서 전문가가 아닌 것이다. ‘삶에 철저히 뿌리내린 공부’라는 기준에서 그는 ‘전문가’가 아니라 ‘초보자’이다.

 

목사님에게 성경은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총체적 해방과 구원 사건이다. 하나님의 선교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2000년 전 뿐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통해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앞서 질문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하셨지만, 성경과 인문학의 관계를 추상적으로나마 그리고 있으실 것 같다. 
신앙하는 삶은 신학뿐 아니라 다양한 인문사회과학적 맥락에서도 설명되어야 한다. 학문이라는 것 자체가 ‘삶’에서 특정 요소를 추상해 조직한 사유체계가 아닌가. 삶에 토대한 학문을 할 때 하나의 삶은 반드시 서로 다른 분과 학문들에 의해 호환되어 설명,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삶이 상실된 학문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영역을 다루는 것 자체가 불안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인문학적 요소가 가미된 성서학이 믿음을 무너뜨린다는 반론이 있다. 성경의 무오함을 헤쳐 신앙을 흔들리게 한다는 입장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성경 해석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성찰은 오히려 많은 유익을 준다. 신앙 사건에 대한 이해, 설명, 해석을 풍성하게 해주고 인문학의 훌륭한 관념들이 삶을 더욱 생기 있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삶의 언어로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설명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돕는다. 다만 특정한 세계관이나 이론 체계에 경도되어, 성경을 그 이론 체계의 권위에 복속시키려 하거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실제로 경험하신 사례인가?
공동체 안에 지적인 교만이 싹튼 적이 있었다. 공동체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영향력이 커지던 시기에 우리 내면에 지적 유희와 교만이 생겼다. 예를 들어 민중신학, 사회과학 등을 처음 접할 때는 기존의 자기 신앙에 대한 도전과 부정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들을 머리로 받아들인 후에는 타인을 향해 ‘너 아직도 이런 책 안 읽어 봤냐?’고 비아냥거리게 된다. 동일한 책(지식)이 ‘자기부정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 ‘교만의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학문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어떻게 극복하셨나?
일단 문제가 생겼을 당시는 공동체가 마을을 이루어 함께 살던 시기는 아니다. 공동체 전체가 침묵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은 많은 삶을 같이 보낸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지켜본다. 그래서 책을 읽은 것 자체로 교만이 싹틀 수 없게 되었다. 앎과 삶의 괴리를 포착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으니 오히려 아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소그룹이나 교회 공동체에 실제적인 조언을 해준다면?
많이 팔리는 책, 유행하는 책을 주로 읽지 말고 자기와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책을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한을 두지 말아야 한다. 사유능력을 키우는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다양한 우주론과 형이상학, 역사와 문명에 대한 분석과 성찰이 담긴 책이나 사회의 지배적인 힘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을 추천한다.

우리 공동체에서는 지금 신대원생들도 어려워하는 《역사적 예수》 같은 신학서를 읽는다. 직장인, 주부, 청년들이다. 현대신학과 철학, 동양고전들, 들뢰즈와 화이트헤드 등 매우 낯설고 어려운 책인데 재미있게 읽어낸다. 삶의 질문과 맞닿은 공부이기 때문이다. 삶에서 시작하고, 삶으로 돌아오는 공부는 지적 유희나 교만이 스미는 것을 막아준다. 신앙하는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 무엇일까.

 

우리 사회가 ‘자기 질문’을 만들어내도록 가만두지 않는 것 같다. 한마디로 여유가 없는 삶이다.
미 대사관 앞에 한국 청년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고 마음 아팠다. 제1전공이 다 ‘영어’가 되어간다. 비극적인 현실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아무리 창조적 사상을 가진 사람도 자기 질문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만 앞서 말한 사대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다. 문제를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창조적 삶의 생성을 위해 함께 노력할 공동체가 중요하다. 성경이든 인문학이든, 함께 삶에 적용하고 해석하고 검증해줄 ‘학습-실천 공동체’가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공부는 ‘지금의 자기’를 넘어서는 수련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행 이범진·오지은 기자  정리 이범진 기자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3077

Trending Articl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