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쉼표
지구의 지붕이라는 티베트에서 온 수행자들이 서울 관광을 했다고 합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며칠 동안 문명세계를 둘러본 이들은 아스팔트 위로 끝없이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고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저렇게들 달려가는 겁니까?
우리는 속도가 신이 되어버린 시대를 삽니다.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트랙을 도는 경주마처럼 질주하느라 숨 가쁘게 헐떡거립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너나없이 바쁘다는 말을 주렁주렁 매달고 사는 인생들. 들숨과 날숨 사이, 우리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도 쉼표가 찍힌다던데. 이러다 숨쉬기조차 까먹게 되는 것은 아닌지요. 이때가 바로 쉼표가 필요한 시점은 아닐까요.
흙이 흙으로만 가득해서는 무엇도 잉태할 수 없습니다. 삶이 삶으로만 가득하다면 생명의 고동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적당량의 공기와 촉촉한 물기가 땅 속 깊이 잠든 생명을 일깨우듯, 쉼표는 삶의 고요와 평화라는 씨앗을 싹트게 하는 사랑의 여백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나무나 풀섶에 둥지를 틀고 고요한 쉼을 얻습니다. 물고기들도 으슥한 수초 속을 파고들며 안온한 쉼을 누립니다. 우리도 지친 몸과 마음을 눕힐 안식의 보금자리를 늘 갈망하지만, 이상하기도 하지요. 그곳에 임해도 마음은 좀체 쉬지를 못합니다. 이토록 쉼 없이 끄달리면서도 쉼표를 찍을 줄 모른다면,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진액은 고갈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삶에서는 싱싱한 생명의 고동을 느낄 수 없지요.
안식보다 더 값진 것이 없으니,
그것 외에는 아무 것도 구하지 말라.
하나님은 철야와 단식과 기도와 모든 형태의 고행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고,
오직 안식만을 거들떠보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요한 마음을 바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안식, 곧 고요한 마음을 바치는 것. 중세의 수도자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쉼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만물은 안식을 주는 것에 끌린다지만, 하나님도 안식만을 거들떠보신다니요? 이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오직 하나님을 빼닮은 인간들만이 안식과 고요를 누리지 못하고, 인세(人世)에는 평화가 피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들처럼 숨만 잘 쉬어도 세상이 편안할 텐데, 오죽하면 ‘안식일’이 생겨났겠습니까.
‘얘들아, 좀 쉬엄쉬엄 살아라!’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인간에 대한 따스한 배려의 마음을 담아, 끝없는 일 욕심에서 좀 쉬고, 근심에서 좀 쉬고, 죽어서 누릴 안식을 여기서 미리 좀 맛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요. 쉼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측은지심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안식일을 만드신 숭고한 뜻이 예수 시대에 와서는 많이 훼손되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유대의 법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도록 하여 굶주린 사람이 있어도 적선을 베풀 수 없었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의원에게 데려갈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사람을 살리자는 법이 사람을 죽이는 법으로 바뀐 것이지요. 예수는 이처럼 본질에서 멀어져버린 안식일 법을 스스로 깨뜨려버립니다. 그리고 대담한 선언을 하기에 이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복음 2: 27)
안식일은 시간에 난 구멍[空]이라는 것. 우리네 빡빡한 삶을 좀 헐렁헐렁하게 트여주는 여백이 안식일의 본질이라는 것. 인간이 만든 법으로 그 여백을 틀어막지 말라는 것. 예수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다 십자가를 지는 고통까지 감수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쉼표는 예수가 피와 고통으로 지켜낸 귀중한 안식입니다.
예민한 더듬이로 우주만물과 교감하는 시인도 안식의 소중함을 알았던 것일까요.
난 요즘 즐겨 쉼표(,)를 찍는다.
서두르지 않고 잠시 쉬어가기 위함이다.
지루했던 길 고단했던 발걸음에 쉼표를 찍고,
잠시 쉬었다 걷기로 한다.
헐떡이던 숨소리에 쉼표를 찍고,
부질없는 생각에 쉼표를 찍고,
쉬어가기로 한다.
하늘을 우러러 쉼표를 찍고,
땅을 굽어 쉼표를 찍고,
산과 들 바다를 마주하며 쉼표를 찍는다.
언젠가는 다가올 마침표(.),
그 작은 동그라미 속에 아주 들어가 갇히기 전에
느긋한 마음으로 쉼표를 찍는다.
박성룡, <쉼표를 찍으며>
지상의 모든 것을 묵묵히 다 품어 안는 ‘땅’을 굽어보고, ‘산과 들 바다’를 마주하고 하늘을 우러르는 것. 개여울에 긴 다리를 담그고 선 흰 두루미가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쳐다보듯, 하늘을 우러르는 몸짓이 이미 ‘쉼표’를 찍는 것이 아닐까요. 숱한 세상사에 시달리다가 푸른 하늘 한 번 쳐다보기만 해도 훨씬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게 되듯. 하나님은 ‘쉼표’를 찍을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하시지 않을까요. 속도와 경쟁에 쉼표를 찍고, 멈출 줄 모르는 욕망에 스스로 쉼표를 찍을 줄 아는 사람! 쉼표는 긴긴 인생 여정에서 우리 마음의 행낭을 가볍게 하는 일이며, 하늘이 주신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실낙원을 떠돌던 자가 낙원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속도와 경쟁에 익숙해진 몸엔 평화와 안식이 영 낯설기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식을 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안식이 영원한 생명의 한 징표라면,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준비가 필요할 테니. “언젠가는 다가올 마침표, 그 작은 동그라미 속에 아주 들어가 갇히기 전에 느긋한 마음으로” 푸른 쉼표를 온전하게 가져보는 행복을 놓칠 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