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한 달동네에 있는 자립지지공동체에서 자신이 돌보는 '이모들'과 '아이들'에 대해 얘기하는 김미령 대표
누군가 훌륭한 일을 한다고 다 취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취재한 것을 다 밝힐 수도 없다. 자립지지공동체 김미령(62) 대표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성매매출신 여성들인 ‘이모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들 5명을 자식 삼아 함께 살아가고 있다. 국가 지원을 받는 사회복지시설도 아니다. 보통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는 그들의 이름이나 사는 지역을 밝힐 수 없다. 예수는 ‘창녀와 세리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에 가리라’고 말했지만, 영문도 모르고 태어난 아이들까지 세인들의 편견에 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서울시내에서 고도가 높은 한 달동네에서 김대표를 만났다. 폐가로 둘러싸인 집이었다. 간판도 없다. 13명의 공동체원중 9명이 사는 곳은 경기도의 한 도시 교외다. 3천만원으로 방 세개짜리 전세집을 구하려다보니 그곳까지 갔다. 그런데 사춘기가 된 아이가 ‘바보같은 이모들과 같이 살기 싫다’ 고 해 그 아이를 위해 이곳에 피난처를 마련했다. 이 마을엔 6살 두딸과 이들을 돌볼 이모가 사는 집도 있다. 김대표는 서울과 경기도 집을 오가느라 분주하다. 그와 전화 한번 하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함께 있어보니, 바로 감이 온다. 어둑어둑해지면서 ‘언제 올거냐’는 이모들의 전화가 빗발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마련한 쉼터를 며칠이라도 거쳐간 1천여명의 성매매여성 가운데 밥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곧 떠나고, 홀로서는 자립하기 어려운 정신지체 등의 장애가 있는 여성들만이 남았다. 갖 돌지난 아이를 둔 한 여성 모녀와 이모들이 사는 경기도 집에서 애타게 찾으니, 그가 다시 길을 재촉하지않을 수 없다. 서울집의 아이들은 이제 성년이 되어 인근에 사는 그의 친아들이 자주 들러 돌보곤한다.
» 김미령 대표가 돌보는 아이들
경기도 집으로 가는 김대표의 양손엔 야채가게 아저씨가 버리기 전에 문자를 보내 알려줘 챙긴 야채더미가 가득 들려있다. 공동체원들 가운데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 받아 정부보조금을 지원 받은 이들이 5명이다. 이 보조금의 절반가량을 모은 200여만원이 13가족의 생활비다. 직원 한명 없이 김 대표가 외부 강연비를 받아 벌충하면서 반찬을 만들어먹어야하니 버린 야채라도 챙기지않으면 생활이 안된다. 그러나 야채가게에서 버린 야채를 손발이 부르트도록 다듬어도 결국 버려야할 쓰레기가 절반이 넘는다. 이렇게 빠듯한 살림을 하는 그의 처지는 아랑곳 없이 ’이모’는 60만원의 정부보조금 중 14만5천원을 담뱃값으로 지출하지만, 그는 “고귀한 성을 남에게 판매하지않는 것만으로 족하다”며 “술·담배까지 뺏어버리면 무슨 재미로 살겠느냐”고 한다.
자립지지공동체는 김대표가 1998년 서울 양평동에서 성매매여성 자립을 돕기 위해 떼밀이학원을 만들며 시작됐다. 성매매를 금지한 특별법이 시행된 2003년엔 속칭 미아리텍사스촌에서 성매매여성피해자위기지원센터를 운영했다. 애초 성매매업소들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부의 하청을 받아 25명의 직원을 두고 시작한 이일을 하며 김 대표는 포주들로부터 2번의 테러를 받아 죽을뻔했다. 그리고 1년반만에 그 하청을 끝냈다. 그러나 그를 찾는 성매매여성들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부의 시설도 아닌 시설이 이처럼 이어져왔다. 시설이 아니니 후원해도 세금감면 혜택이 없어 거의 후원금도 들어오지않는 일을 홀로 감당해온 것이다.
» 공동체에서 아이들 먹을 과일과 밤을 챙기고 있는 김미령 대표
그가 지금까지 상담한 3천여명의 성매매여성들은 어느 누구하나 불면증에 시달리지않는 이들이 없었다. 그들이 돈에 팔려서 그랬든 먹고살기위해서 했든 성매매 과정에서 새겨진 깊은 상흔을 지워지지않았다. 그가 성매매 초범들이 받아야하는 16시간 의무교육 현장에서 최고의 강사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여자들이 당신들과 알몸으로 붙어있을 때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를 내가 대신 해주겠다”고 시작한다. 그는 “성적권력이 동등하지않은 채 했던 것은 섹스가 아니”라고 한다. 1회용 플라스틱컵을 돈을 주고 구매했다고 해서 지구를 오염시킨 죄까지 사면받을 수 없듯이 돈을 주고 섹스를 했다고해서 가해에서 면죄되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늙은 창녀의 노래’를 말로서 들려주는 셈이다.
연세대 아동교육과를 나온 김대표는 재벌집 아이들이 줄서서 기다린다는 연대 부설유치원 연구원 겸 교사로 10여년을 일했다. 그러면서도 밤엔 연대 적십자동아리에서 운영하던 야학 상계적십자청소년학교에서 봉사하며 교장까지 했다. 터부를 넘는 그의 성격은 종교에서도 드러났다. 대학생때는 연세대연합교회에 나가는 개신교인이었다. 그러다 1970년대엔 가톨릭 사회운동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하면서 ‘막달레나’라는 세례명까지 받았다. 이어 1985년 성공회 신부가 된 남편과 결혼하며 성공회 신자가 되었다. 그가 ‘동지로 살아가는 실험을 해보자’며 1985년 임시정부수립일에 성공회대성당에서 올린 결혼식에서 신부는 드레스를 입던 관행을 깨고 색동저고리를 입었고, 식후 7시간동안 마당에서 친구들과 난장을 펼치며 놀았다. 개신교 내 여성차별을 저항하며 여성 안수를 이끌어낸 여성교회 운영위원장이자 성공회에서도 여성성직위원장으로서 여성사제 탄생에 선구적인 구실을 한 그지만 그는 자신을 페미니스트가 아닌 ‘아나키스트’라고 칭했다.
그의 이런 아타키스트적 성깔은 내력이 있다. 그의 부친은 윤동주가 나온 간도 용정중학교와 니혼대 예술학부를 나온 연극인 김익환이다. 그 부친이 결핵성늑막염으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해 내과 간호부장이던 그의 어머니 백옥심씨를 만났다. 당시 어머니는 의사들이 곧 죽을것이라던 남편을 살리기 위해 남편의 고향인 전북 부안으로 낙향해 남편을 살려내고, 산파와 초등학교 교사를 해 세자녀를 교육시켰다고 한다. 그 어머니는 201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살며 김 대표에게 “나는 산파로서 아기를 받기만 했는데 너는 기르기까지 하니 나보다 낫다”며 아이들을 지극히 귀여워하며 딸을 응원했다. 아버지 김익환은 1955년 제작된 최초의 유성영화 <피아골>에서 국군 대장으로 나온 배우 허장강과 함께 북한군 대장으로 출연했다고 한다. 그 부친은 막내딸에게 “나는 우리나라 최후의 아나키스트”라고 했다. 박열의 아내로 일본 천왕제를 거부했던 가네코 후미코의 제삿날마다 일본으로 직접 달려가는 그야말로 이제 ‘최후의 아나키스트’라 할만하다.
» 김미령 대표가 사랑하는 책들. 그는 예수와 함석헌도 일체의 권위를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로 본다.
그는 아나키스트는 무질서가 아니라 “내가 합의하지 않는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모든 권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며, 동의하지않는 것은 다수결이라도 따르지 않고, 동의한 것이라면 전체의 결정이라도 자신의 결정한 것처럼 따른다는 것이다. 성매매여성들이 쉼터에서 쉬었다가 다시 성매매를 위해 가겠다고 할 때 주저앉히지않고 그들의 자결권을 존중한데서도 그의 아나키스트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이기도 한 그는 “함석헌이 이미 노인일 때 젊은여성과 ‘관계’를 가지며 사랑했다는 점에서 ‘미투의 대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가네코 후미코가 당시 일본 사회의 가치관과 통념을 거부했듯이 함석헌의 사랑도 아나키즘적 실험이라고 보기에 당대의 윤리에 맞지않다고 단죄하고 싶지않다”고 했다.
그의 남편은 은퇴 뒤 전북의 산골에서 공동체에 들어온 아이들 가운데 유일한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고 있다. 김 대표 부부는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나 마하트마 간디처럼 50살이 되자 결혼을 졸업하는 ‘해혼’부부가 되기로 했다. 법적인 이혼을 하지않았지만 육적인 관계를 끝내고 동지로만 남자는 것이다. 아이들의 부모로서만 함께하면서 말이다.
그는 권력, 폭력, 권위 같은 강한 것들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지만 강한 것들로부터 버림 받은 약한 이들을 보듬고 살아가고 있다. 지인들은 그에게 “성매매여성들 가운데서도 뒤쳐진 그런 이들속에서 한나절만 있으면 돌아버릴것 같은데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그는 “평균 지능지수 70이하인 그들을 나처럼 살게 할수는 없지만, 내가 그들처럼 함께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지능지수가 낮고 세상에 잘 적응하지못하는 이들을 억압하지않고 함께 뒹굴뒹굴 할 때 그들 만이 아니라 자신도 치유된다는 것이다. 그는 “집에 가면 10여명이 ‘언니’, ‘엄마’하고 한꺼번에 달려든다”며 “내 나이에 이런 복 누리는 사람 봤느냐”고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