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 내 의열사 앞에서 이야기중인 김영 교수
“김영 교수님을 모시고 숙대에서 공부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을 위한 한문강의> 10강. 사서삼경뿐만 아니라, 순자, 묵자, 박지원, 정약용, 채근담 등 다양한 텍스트가 너무 재밌어서 단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배우고 있다. 그 어려운 문장들을 너무도 쉽고 깊게 가르쳐 주신다. 선생님 나이에 내가 저렇게 강연할 수 있을지.”
최근 윤동주 연구가로 유명한 김응교 숙대 교수가 자신이 위원장으로 있는 한국작가회의 국제위원회의에서 연 제4회 세계문학아카데미 초청강사인 김영 교수의 강의를 듣는 소회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아주대 의대 최영화 교수와 최근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한 김준영 거문고연구가 겸 작곡가 등과 함께 강좌를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이다. 수강생들은 내친김에 내년에도 더 장기적인 법석을 펼치자며 추가 강연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김 교수는 이를 거절했다. ‘서울시내에선 강사료만 주면 얼마든지 좋은 강사를 모실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기는 “인천의 작은 도서관에서 강의하겠다”는 것이다. 지난해 대통령선거에서 더민주당 인천시 선거대책위 공동위원장을 맡았으면서도 문재인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는 날 에스엔에스에 “선거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모두 물러나고 이제부터 적재적소에 인물을 기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선언한 그다운 모습이다.
인문학적 상상력 위한 한문강의 유명
지난 19일 숙대 옆 효창공원에서 김영(65)교수를 만났다. 그는 백범 김구 선생의 묘를 보자 “백범은 군사강국이나 경제강국이 아니라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 하지 않았느냐”며 “그 힘이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효창공원의 백범이나 삼의사 같은 해방전사들과 인문학자는 전혀 통할 것 같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 김 교수가 바로 그 증인이다.
김 교수는 문학소년이었다. 소설가 김동리, 시인 박목월, 아동문학가 김성도가 나온 대구 계성고에 진학해 경북 의성의 시골에선 본적이 없던 문학서들을 보자 그는 갈증 난 사람처럼 마음껏 들이켜다가 연세대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그런 문학소년을 뒤흔든 것은 우선 학내 자유교양회라는 독서모임이었고 그 다음이 학내까지 군인들을 진주시킨 박정희 독재였다. 그는 “1971년 위수령이 발동돼 교련반대를 주모한 학생회와 이념동아리 학생들이 모두 잡혀가 이가 빠지자 잇몸 격인 ‘독서모임’에서 삭발을 하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뜻하지 않게 책에만 안주할 수 없게 된 그는 자신이 좀 더 강인해질 필요를 느끼고 해병대에 입대했다. 제대 뒤엔 복학해 민족사학의 계보를 이은 김용섭 교수와 역사주의적 인문학자 임형택 교수를 사사하며 식민지근대화론에 맞서 주체적 문학발전론을 정립해갔다. 이런 노력은 민족문학사연구소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임형택 교수를 대표로 모시고 그가 기획실장으로, 지배층들만의 고전을 민본사상으로 재해석한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등의 실학 사상과 문학을 알리는데 앞장섰다. 학교 밖에서는 향린교회 대학생부에 다니며 안병무 박사를 통해 억압 받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민중신학에 눈을 떴다.
자락서당 훈장하며 교육공동체
그가 필생의 학문이 된 ‘한문’의 세계에 들어선 것은 대학원 때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으로 선발되면서부터였다. 그 재단은 대가 끊길 위기에 있는 한학을 공부할 이들을 에스케이가 선발해 경기도 남양주 태동고전연구소 지곡서당 임창순 선생에게 3년간 맡겨 전통식으로 배우게 했다. 김 교수는 “그때 논어, 맹자를 외느라 머리가 다 희어졌다”고 했다.
그는 태동고전연구소를 마치고 강원대 국문학과 교수에 이어 1992년부터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옮겨 사대 학장과 교육대학원장, 교수회 의장까지 지냈다. 교수 시절 민족문학사학회 대표, 한국한문학회 회장 등을 지내고, 2016년엔 인하대 총동창회가 주는 ‘인하참스승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지난 8월 정년퇴직했다. 그러나 월급 없는 ‘자락서당 훈장’만은 놓지 않았다. 고향 마을 ‘자락리’에서 따온 ’자락(自樂)서당’은 교사임용고시에 떨어진 학생들이 낙방을 부끄러워하고 사람도 만나지 않으려 하자 달래 논어, 맹자, 장자를 공부해보자며 시작한 것이다. 그 덕에 공부에 재미를 붙인 이들은 교사가 되고 교감, 교장이 되어서도 함께 했고 늘 10~15명을 유지한 교육공동체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일반인들이 ‘꼰대’로 생각하기 쉬운 그런 책상물림 ‘훈장’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광화문 시위 현장에 개근상감인 그다. 그가 광화문 촛불시위에 빠짐없이 나온 것은 남성과 소수 권력자들에게 억압받은 가난한 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길을 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그는 “고전의 핵심이 ‘옛 것을 본받아 새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이며, 지금 새롭게 해야 할 것은 ‘지배자가 아닌 백성이 근본’인 ‘민유방본(民惟邦本)’이니 이를 실현해야 한다”며 ‘거리의 인문학자’가 되었다.
» 지난해 10월 경북 안동 경안여고에서 '드림렉쳐'를 한뒤 학생들과 함께 한 김영 교수. 사진 김영 교수 제공
“런던 가보니 교수 갑질커녕 헌신”
또한 ‘함께 사는’ 대지혜를 가르치지 않고, 나만 잘되면 된다는 소지혜 교육으로 김기춘, 우병우 같은 엘리트들을 기른 이 나라 교육계의 일원으로서 반성과 혁신의 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거리엔 여성민우회와 가족과성상담소 창립멤버인 부인 서은숙(62)씨가 늘 함께 했다.
부부는 다양한 북콘서트와 강좌의 청중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에도 함세웅 신부의 <이땅의 정의를>, 김근수 가톨릭해방신학연구소장의 <평화의 예수>, 정혜신 박사의 <당신이 옳다>, 전호근 교수의 <장자>를 들었다. 법륜 스님이 어떻게 대중과 공감하는지 즉문즉설도 함께했다. 김 교수는 “연암 박지원은 ‘모르는 게 있으면 길 가는 아이에게라도 물어라’고 했다”며 “배우면 다 내 것이 되는데, 왜 배우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런던에 공부하러 가보니 대학교수들이 갑질은커녕 다 파티를 준비하고 학생들은 와서 먹고 가면 교수들이 치우더라”며 “에헴 하며 제자들이 찾아오기만 기다려서 뭐 할 건가. 나는 이렇게 찾아다니며 배우는 학생이 되겠다”고 했다.
그의 소통은 더 아랫세대로 내려간다. 한국고등교육재단이 장학 혜택을 본 이들이 학문을 지방 고교생들에게 환원하는 드림렉쳐 ‘너만의 꿈을 키워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그는 매번 강의료로 책을 사서 나눠주며 좌절감이 큰 지방의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이름만큼이나 ‘젊은(Young) 그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