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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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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역할을 바꿔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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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다닌 유치원은 아이 걸음에 맞춰 걸어가면 25분 정도,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가면 10분 정도 걸렸습니다. 운하를 따라 나있는 산책길을 아이와 오가던 시간이 이 어미에게는 아직도 예쁘고 행복한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종알종알 질문도 많고, 계절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그에 맞는 동요도 부르고, 누구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하고, 흙탕물 같은 데를 지날 때는 장화로 첨벙거리며 즉흥적으로 노래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독일말을 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방과후에도 독일말로 동무들과 놀게 되니, 한국 노래를 하고 한국말을 하는 시간은 점점 아침과 오후의 산책 때로만 줄어들기 시작했지요. 유치원도 버스로 데리러 오고 데려다 주는 한국에 비하면 엄마 (혹은 아빠)의 공이 더 드는 듯 하지만 아이가 세상을 만나가는 모습을 함께 할 수 있는, 생에서 유일한 시간이라 참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딸아이가 만 네댓 살 정도 되었을까요, 어느 초겨울 아침이었나 봅니다. 눈이 좀 왔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지 않고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내가 딸이고, 네가 엄마가 되어볼까라고 제안했더니 신나 했지요. 늘 ‘공부’를 하는 버릇일까요, 아이가 사계절을 분명히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질문을 시작합니다. 

 

 “엄마, 나뭇잎들이 다 어디 갔어요?” “아아, 겨울이니까 다 내려앉았지.” 내려앉았다는 표현에 은근히 감동하면서도, 징징대는 시늉을 하며 내처 물어봅니다. “그럼 다시는 나뭇잎을 못 보는 거에요?” “아니야, 아기야. 봄이 되면 다시 나뭇잎이 나오지.” “그 다음에는?” “여름이 오면 해가 많이 나고 꽃도 많이 핀단다! 아기가 좋아하는 복숭아도 먹을 수 있어.” 엄마의 이름을 불러 본 적이 없는 딸은 저를 아기라고 부르며 상냥하고 진지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길을 더 가다 보니 어느 집 담벼락에 상록수가 여러 그루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 그런데 왜 저 나무들은 아직도 파래요?”하고 물었습니다. 아이가 과연 뭐라고 답할 것인지 무척 궁금했는데 사실 제 자신 어떻게 답할지 막막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아이는, “초록색이 뭔지 잊어버리지 말라고!”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와아! 너무 기가 막힌 대답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는 잔디밭 쪽으로 달려가 하얀 눈을 가리키며 “아기야, 이게 하얀 색이야. 하얀 색이 뭔지 잊어버리지 말라고 눈이 온 거야!” “와아~ 우리 엄마, 최고다!”하며 저는 환호성을 터뜨렸, 아이도 자기의 대답에 흡족한지 진지했던 얼굴이 환하게 펴졌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유치원에 다다랐고 행복한 마음으로 “안녕!” 한 뒤, 저는 카페로 가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이 날의 대화를 잊지 않으려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듯 유치원 가는 길에서 아이에게 참 많이 배웠습니다. 모든 것은 볼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다 있는 그대로 좋은 것이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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