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9월12일 3개월마다 한번씩 열리는 서울시 전직원 조례에서 조현 기자가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로운 이들을 위한 마을공동체 탐사기'<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휴 펴냄)로 강의한 내용을 <씨알의 소리> 11·12월호에 발췌해 정리해 실은 내용임 )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롭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1.외로움과 고독의 시대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체 홀로 쓸쓸하게 삶을 마감하는 고독사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지금은 누군가 고독사를 당하면 뉴스가 되기도 하지만, 앞으로 고독사는 너무 많아 뉴스거리조차 되지못하는 시대가 될지 모른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홀몸노인 무연고 사망자는 최근 5년간 3천331명에 달했다. 연도별로 보면 2014년 538명, 2015년 661명, 2016년 750명, 2017년 835명으로 크게 늘고 있는 추세다. 2018년엔 6월현재 지난 2014년도 고독사 수를 추월한 547명이다.
앞으로는 고독사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배우자나 자녀 없이 살아가는 65세 이상의 홀몸 노인이 크게 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홀몸노인 인구는 2014년 115만2천673명, 2015년 120만2천854명, 2016년 126만6천190명, 2017년 133만6천909명 등으로 늘었다. 2018년 6월 현재는 140만5천85명으로 2014년에 비해 17.9% 증가했다. 현재 홀몸노인 중 가장 많은 연령대는 75~79세로 34만5천524명이었고, 90세 이상 초고령 홀몸노인도 4만2천127명에 달했다. 최근 5년간 전체 노인 고독사를 성별로 보면 남성 2천103명, 여성 1천228명으로 남성이 월등하게 많다.
고독사만이 아니다. 홀로 사는 1인가구가 급증하고 있다. 2017년 현재 우리나라에서 1인가구수는 561만8677가구다. 평균 가구원수는 2.5명이지만, 전체 가구가운데 28.6%가 1인 가구다. 모든 가구수 가운데 1인 가구가 가장 많다. 그 다음이 526만 가구(26.7%)인 2인 가구, 417만9천 가구(21.2%)인 3인 가구, 347만4천 가구(17.7%)인 4인 가구, 114만2천가구(5.8%)인 5인 가구 순이다.
1인 가구는 늘어나는데, 이들의 삶의 여건은 궁핍하다. 한 금융연구원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조사했는데도 1인가구의 순자산이 1억원 남짓에 불과하다고 했다. 65세 노인인구의 상대적 빈곤율(중위소득의 50% 미만인 계층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7년 기준으로 45.7%를 보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1위로 가장 높다. OECD 가입국 평균 노인 빈곤율은 12.5%이다.
우리나라 1인가구들의 궁핍한 처지는 주거 현실에도 반영돼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1인 가구의 현황 및 특성’에 따르면 187만5천 가구(36%)가 월세집에 살고, 83만1천 가구(16%)가 전세로 산다. 월세나 전세로 사는 비율이 52%로, 자가에서 사는 34%(177만4천 가구)를 크게 상회하고 있다.
이런 객관적인 수치들이 말해주는 것은 홀로 사는 사람들은 급증하고 있는데, ‘화려한 싱글’과는 거리가 멀며, 상당수가 고립과 고독사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2.외로움이 가져다주는 것들
인간은 고립을 가장 두려워하기에 누군가와 연결되고 만나기를 갈망한다. 인터넷은 만남을 너무도 쉽게 만들었다. 생후 한 달 만에 생모와 떨어져 입양돼 외톨이로 자란 스티브 잡스는 인간들을 연결하고 싶어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발명했다. 그것은 단절의 아픔을 딛고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잡스 개인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의 꿈대로 세상과 단절돼 친구 한 명 없는 사람도 SNS에서는 수백 수천 명의 친구를 손쉽게 만들 수 있다. 그 연결이 가족과 마을, 공동체 같은 걸 대체할 수 있을까.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은 외로움을 다소 위로해줄지언정 심층의 외로움을 달래주긴 어렵다. 오늘날 홍대 앞과 강남역 일대 등 아날로그적 장소로 나와 배회하는 이들은 상당수가 디지털 세대다.
얼마 전 영국이 체육·시민사회장관을 ‘외로움’ 담당 장관으로 겸직 임명했다. 영국 내 ‘조콕스 고독위원회’가 2017년 12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 건강에 해롭다. 위원회는 ‘고독이 개인적 불행에서 사회적 전염병으로 확산됐다’면서 고독을 질병으로 규정했다.
외로움이 병을 낳는 것과 달리 결혼이나 친밀한 관계가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 연구로 밝혀지고 있다. 영국 러프버러대학의 에프 호헤르보르스트 생물심리학 교수 연구팀이 52~90세 6천 677명을 6년 동안 조사한 바에 따르면 친밀한 관계가 알츠하이머 치매를 막는 데 크게 도움이 됐다. 조사 기간 내 220명이 치매 진단을 받았는데, 친밀한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은 사람은 치매 발생률이 60퍼센트가량이나 낮았다. 이에 비해 독신 남녀는 치매 발생률이 35~44퍼센트로 높았다.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한 이들이라고 혼삶에 문제가 없지는 않다. 아주 가까운 한 지인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상위 1퍼센트 이내에 들만큼 성취를 이룬 분이다. 그는 20년 전쯤 이혼을 했고, 자녀들은 모두 외국에 있어 홀로 서울의 대저택에 살고 있다. 얼마 전 그는 건강검진으로 장에 용종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병원에서 시술을 위해 보호자를 데려오라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데려갈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애를 먹었다. 현대인은 하나같이 바쁘니,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공동체원이 아니면 그런 사소한 부탁을 할 사람이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10~20년 앞선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고령화가 우리나라보다 앞서 진행됐고, 고립과 고독사 같은 문제들이 앞서 문제시됐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거울일 수 있다. 그런 일본에서 최근 일부러 교도소에 가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 일본은 65세 이상의 노인이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가족, 파트너와 살지 않는 독거노인의 숫자는 1985년에 비해 2015년에 600% 가량 증가했다.
그런데 노인들이 고독과 병치료등의 어려움 때문에 일부러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쳐 교도소행을 택한다. 2016년 입소자 2만467명 중 2498명(12.2%)이 65세 이상 고령자다. 1997년 596명(2.6%)보다 4.2배 증가한 수치다. 여성 수감자는 40명에서 363명으로 20년 사이 10배 가까이 늘었다.
이들은 교도소에 함께 식사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치료까지 해주기 때문에 홀로 고독하게 지내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로는 노인 수감자의 경우 치료비등을 포함해 1년에 2만 달러(약 2139만원)의 비용이 소요돼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교도소 수감자의 생활 여건이 연 78만엔(약 790만원)으로 최저생계비 98만엔(992만원)의 80% 수준인 연금 수혜자보다 낫다고 평한다고 한다.
3.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
외로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친밀하게 지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조사가 있었다. 하버드대학이 1938년부터 79년간 724명의 삶을 추적 연구해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건강과 행복이 인간관계의 친밀함에 달려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삶을 가장 윤택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이고, 사람을 죽음에 내모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4번째 연구 책임자였던 월딩거 박사는 “가족과 친구, 공동체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했다”며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은 건강했고, 더 장수했다”고 밝혔다. 그는 “조직 생활이나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외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며 “외로움은 흡연이나 알코올중독만큼 강력하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친구의 숫자보다 친밀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옆에 누군가 있다 하더라도 앙숙처럼 다투며 고통을 주고받는 당사자끼리 함께 있는 것은 따로 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월딩거 박사는 “주변인과 갈등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건강에 나쁘다”며 “다툼이 심한 부부보다 이혼한 사람이 건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최근엔 가족이 많을수록 암 위험이 낮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호주 애들레이드대 연구팀은 전 세계 178개국 데이터를 토대로 가족 구성원의 수와 암 발병 위험의 관계를 분석했다. 그 결과, 가족이 많을수록 암 발병 위험이 낮았다. 구체적으로 인구 100만명당 암 발병률은 △7인 가족의 경우 22명 △6인 가족 25명 △5인 가족 29명 △4인 가족 34명 △3인 가족 43명 △2인 가족 58명 △1인 가족 100명 등이었다. 한국인의 암 발병률은 2015년 기준 인구 100만명당 42명이다.
연구팀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추측하고 있다. 첫째, 옥시토신의 영향이다. 옥시토신은 인체 면역·신경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결과적으로 암세포의 증식을 막는데, 사회적 유대감이 강력할수록 옥시토신의 분비량이 늘어난다고 한다. 둘째, 가족의 지지다. 가족이 많을수록 서로의 건강을 챙기게 되고, 이로 인해 더 건강하게 지낸다는 것이다. 셋째, 유전적 영향이다. 연구를 진행한 유웬펑 박사는 “유전적으로 출산 자녀수가 많을수록 자녀들의 암 유전자와 돌연변이 축적이 감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특히 가족에서 나아가 이웃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지내는 이들의 행복도는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한다. ‘함께 살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삶의 여유와 재미를 더해주고, 실직이나 힘든 일을 당해도 내 일처럼 함께 해결해주고, 경제적으로도 절감 효과가 대단하다. 내 감으로는 평균적으로 공동체원들은 우리나라 하위 20~30퍼센트 소득계층 정도의 지출만으로도 상위 70~80퍼센트 계층의 여유 있는 삶을 누리는 듯 보였다. 저소득층 정도의 지출만으로도 중산층 정도의 여유를 향유한다는 뜻이다. 공동체가 자본주의 자본가 입장에선 반경제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각자 개인으로서는 적게 쓰면서도 몇 배의 효과를 누리는 가장 경제적 시스템인 셈이다. ‘함께 산다는 것’의 강점은 경제적 효율만이 아니다. 그들이 바깥세상에선 느껴본 적이 없는 치유와 살맛을 줘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 상위 90퍼센트 이상의 행복도를 경험케 한다. 외로우면 아무리 먹어도 허기가 지고, 사랑을 받으면 조금 덜 먹어도 든든하고 힘이 난다는 것을 마을공동체 사람들의 삶이 증명한다.
인간은 자기 홀로는 호랑이나 표범에 비해서도 무력하기 그지없지만, 서로 의지하고 돌보고 협조하고 힘이 되어주고 위로해주고 사랑해주면서 행복해지고 강해질 수도 있다. 스웨덴은 국민의 5분의 1 이상이 공유 주택에서 살고 있다. 공유 주택으로 함께 거주하는 이들이 잘 조화되면 10개의 보험을 들어두거나, 북유럽 수준의 복지 시스템을 구축한 것보다 행복에 더 나아 보였다. 나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복지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유럽에서 살아보고 싶은 열망을 가진다. 살고싶다고 한다. 나도 유럽에 사는 지인들이 있지만, 내가 아는 한 국내의 마을"E공동체살이를 하는 분들의 만족도가 더 컸다. 유럽의 한 지인은 내가 쓴 국내 마을 이야기를 보고는 그곳에 와서 살고 싶다고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마을공동체살이를 하는 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부분 안도했다. 더 이상 미래만을 걱정하며 평생 준비만 하는 인생을 살 필요가 없다며, 아이들에게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라고 닦달하지 않았다. 직장을 포기하거나 재산을 헌납하거나 절대 고독의 수행을 하지 않고도 행복을 만들어낸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들에겐 휴식과 여백이 있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초스피드 사회에서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앞집에도 옆집에도 뒷집에도 죽도록 뛰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안해하지 않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쉬는 사람들이 있는 것만큼 평온한 환경이 또 있을까. 남들 다 달려가는데 나만 쉬면 큰일 날 것 같은 불안과 비교와 부러움과 질시로 괴로운 사람들을 그만큼 편하게 쉬게 해주는 환경이 분위기가 있을까.
사람들이 평생을 찾아 헤매고, 자본주의적 성공을 거둔 사람들조차 요원해 보이는 행복이 그렇게 가깝게 있다는 것을 고난의 행군 중인 한국인이 쉽게 믿을 성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것이 소수의 독특한 사람들만이 체험하는, 정신적 모르핀 같은 것일 수 있다는 의구심에서 더 많은 이의 인터뷰가 필요했다. 무려 3백여 명을 인터뷰해 <우린 다르게 살기로 했다>는 책을 쓴 것도 그런 의구심 때문이었다.
인터뷰와 만남이 더해갈수록 그들을 마을공동체사람들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행복하게 사는 행복하게 하는 비결이 선명해졌다. 그들은 혼자만 잘 살아보겠다는 이기적 욕망의 동굴을 나와 사람들과 함께했다. 아니다. 함께 사는 게 행복하기에 더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있었고, 상처의 동굴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역으로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마을공동체 자체가 주는 치유와 자족의 효과가 그만큼 크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의지가 되는 이들은 가족임에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공동체는 닫힌 가족주의와는 다르다. 애증이 짙은 또 하나의 동굴인 가족 내에만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공동체살이를 하는 이들이 바깥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족과 많은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건 맞지만 그들이 더 많은 여유와 재미를 갖게 된 건 가족만 아니라 이웃 가족들과 함께 협력하고 의지하고 서로 돌보며 친밀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이 통하고, 필요할 때 서로 도움과 힘이 되는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려 살아가는 것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거나, 어느 나라에서 사는 것만큼이나 삶의 행복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대부분이 이토록 중요한 것을 도외시한채 정 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 9월12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서울시 박원순 시장을 비롯한 간부들과 전직원 1천여명을 대상으로 강연중인 조현 기자
4.왜 관계를 어려워하는가
현재를 4차 혁명 시대라고 한다. 4차 혁명으로 인한 경제적 변화만큼 중대한 변화가 바로 ‘인간의 탈포유류 현상’이다. 포유류의 라틴어 맘마(mamma)는 젖가슴이란 뜻이다. 어린 시절 엄마는 젖을 줄 때 ‘맘마 먹자’고 한다. 젖을 먹이는 어미는 본능적으로 목숨을 걸고 새끼를 보호하고, 새끼는 어미의 보호를 받고 받으면 안정감을 느끼며 자라는 것이 포유류의 특징이다.
엄마는 100만 년 전에도 10만 년 전에도 1만 년 전에도 1천 년 전에도 다른 포유류와 다름없이 온 신경을 새끼에게 쏟았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경쟁이 가속되고, 아기에 대한 엄마의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지면서 오랜 세월 공고하게 ‘맘마’로 유지되어온 연결고리에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한국은 그 균열이 훨씬 단시간에 벌어졌다.
고향 마을 출신 지인은 1960년 초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영등포 시장에 나가 노점을 차려 장사를 했다. 부부는 막 젖을 뗀 아들과 태어난 지 몇 개월밖에 안 된 딸을 두고 나가야 했다. 둘이 나가서 온종일 일을 해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어린 아기들 발에 줄을 묶어 문고리에 매어두고, 방에 밥과 물을 담은 그릇을 놓은 채 시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부부가 장사를 끝내고 돌아와보면 밥과 물그릇은 엎어지고 아기들은 얼굴과 몸에 밥풀을 덕지덕지 묻히고, 문을 향해 나오다 줄이 서로 엉켜 울다 눈물과 콧물이 굳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고 했다. 부모들이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이 부모로부터 온종일 떨어져 포유류로선 상상키 어려운 상실감을 아이들이 겪은 셈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급격한 성장 시대 이런 상실감은 보편적이다. 신문사의 한 후배는 어린 시절 직장 맘인 엄마가 곁에 없어서 늘 우울했다고 고백했다. 언젠가 엄마가 보고 싶어서 찾아 나섰는데 가도 가도 논밖에 없어서 논 한가운데 서서 울던 기억이 또렷하다고 했다. 한 여자 후배도 부모님이 맞벌이였는데, 시골 할머니 집에 데리고 가서는 자기만 떨어뜨려놓고 가버리곤 했을 때의 아픔과 쓸쓸함을 마흔이 넘은 지금도 떨쳐버릴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서너 살 아이라도 알아듣게 얘기하고 설득하면 좋으련만 엄마, 아빠는 매번 아이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놓고는 한순간에 내빼곤 했다는 것이다. 어린 그는 엄마, 아빠와 오빠로부터 자기만 홀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온 식구들이 쓰는 속임수에 잠시 한눈을 팔면 언제나 엄마, 아빠는 사라지고 없어서 마을 동구 밖까지 종종걸음으로 ㅤ쫓아갔다가는 울며 되돌아오곤 했다. 그로 인해 대학 시절 캐나다로 한 학기 동안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도 분리 공포로 두 달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고 한다.
아이 때만이 아니다. 그 이후 성장 과정에서도 아이들은 제대로 돌봄이나 공감을 받기보다는 정글 같은 경쟁에 내던져졌다. 우리 시대 많은 부모는 노후 준비도 못하고 자식 뒷바라지하다가 노년을 맞았다. 그런데 자식들이 엉뚱한 소리를 한다. “누가 그러라고 했냐”는 것이다. 먹이고 재워가며 학비와 학원비 대느라 허리가 휜 부모는 억장이 무너진다. 배우자도 없이 홀로 자식을 돌본 경우라면 더욱더 기가 막힐 수밖에 없다. 자식은 부모가 먹고사니즘을 위해 자식을 버려두고 떠났다가 뒤늦게 나타나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면서 “내가 외롭고 힘들어 울고 있을 때 엄마, 아빠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느냐”고 울분을 토한다. ‘밥 먹여주고 등록금, 학원비만 대주면 다냐’는 것이다. 부모는 물질과 경제적 헌신을 얘기하고 있는 반면, 자식 세대는 그로 인해 겪은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 수백만 년의 인류사에서 이 시대만이 겪는 각별한 세대 간 간극이 아닐 수 없다. 즉, 굶어죽지 않기 위해 올인해야 했던 부모 세대와 생계에 엄마를 빼앗긴 자식 세대 간의 간극이다.
정신적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자식에게 부모 세대는 “배부른 소리한다”고 치부한다. 자신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대상이 서로 다른 것이다. 젊은 세대도 부모 세대가 얼마나 윗세대, 즉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면서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는지를 모르지 않는다. 고생한 부모에 대한 한없는 연민도 있다. 한부모였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내면에 부모에 대한 분노가 휴화산처럼 잠재돼 있어 서로 떨어져 있을 때는 그리워하면서도 정작 만나면 알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분리 트라우마를 준 데 대한 원망’ 때문이다.
인간은 일차적인 욕구가 해결이 안 되면, 즉 배가 고프면 오직 먹는 데 온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러나 식량을 비축한다고 모든 고통이 일거에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그 이후에도 많은 고통이 있으며, 또 다른 욕구가 생기게 마련이다.
일차적 생존 욕구가 해결되면 정신적 욕구로 이행된다. 정신적 욕구 가운데 특히 아기에게 가장 중대한 것은 안전이다. 아기에게는 안전을 지켜주는 절대자, 즉 신이 바로 엄마다. 윗세대는 당장 먹고 살 게 없었기에 일차적인 욕구에 매진했지만, 그 이후 세대는 굶어죽을 일은 거의 사라져 기아는 고통의 종류에 들지도 않는다. 그들에겐 생존 이후의 욕구, 즉 ‘엄마’가 가장 중대했고, 모정의 상실과 결핍이 가장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행동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 형성된 안전 기지가 평생 동안 안정적인 삶에 영향을 준다고 한다. 안전 기지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지켜주는 엄마가 있다는 믿음을 통해 형성된다.
아이 때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애착 시스템에 이상이 생겨 ‘회피형 인간’이 되기 쉽다고 한다. 어려서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믿음을 배반당하는 일이 반복되면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더 상처 입지 않기 위해 관계를 회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려서 엄마와 애착이 형성되고 정서를 공유해 기쁨을 맛보면 타인과의 정서 교류에서 오는 즐거운 체험 때문에 늘 쉽게 타인과 교감하지만, 일찍이 단절과 차단을 경험하면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런 두려움으로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한다’는 불신이 내장되는 것만큼 큰 불행이 있을까. 회피형 인간은 개인주의와 도시화, 핵가족화 증가에 따라 급격히 늘었다. 농경 사회의 대가족 사회에서는 그 수가 극히 희박하다. 따라서 혼인율과 출산율 저하는 경제적 요인만이 아니라 회피형 인간의 증가라는 심리적 요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기들에겐 생물학적 엄마만이 엄마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엄마를 대체해온 ‘엄마들’로부터도 분리됐다. 여기서 ‘엄마들’이란 전통 사회에서 사정이 있어 엄마가 일터에 나가거나 다른 일을 해 아이를 돌보지 않더라도 아이를 대신 보살필 수 있었던 대가족과 친인척, 마당, 놀이터를 말한다. 급격한 도시화로 대가족과 고향 마을이 붕괴되기 전에는 엄마만이 아니라 더 큰 엄마인 대가족과 마을공동체가 있었다.
한국의 도시화와 핵가족화는 너무도 급작스럽게 진행됐다. 유럽은 산업혁명 이후 수백년간 서서히 변화해왔지만 한국은 1960년 이후 너무도 급작스런 변화에 미쳐 적응할 틈이 없이 스트레스가 그대로 무의식에 내장돼 트라우마를 남겼다. 인간이 수백만 년간 사회적 동물로서 익숙해진 공동체가 한순간에 빙하가 녹듯 녹아 이들이 디딜 안전판이 사라져버린 것이 현대 한국 젊은이들의 깊은 상처를 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도시 지역 거주 비율은 1960년엔 40퍼센트 미만이었으나 1990년에는 81.95퍼센트로, 2017년엔 91.82퍼센트로 늘었다. 농촌 마을에서는 부모가 농사일이나 다른 일을 하더라도 많은 형제자매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친척, 이웃집 아줌마, 아저씨, 형, 누나 등 제2, 제3의 안전망이 있었다. 엄마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대가족과 마당이라는 천연의 안전망이 있었다. 이 안전망이 오직 엄마에게만 지워지는 부담을 덜게 했다. 설사 엄마를 잃더라도 엄마를 대신할 제2, 제3의 엄마가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핵가족하에서 아이들은 고립된 채 방치됐고, 나중엔 방과 후 학원에 맡겨졌다. 250만 년간 엄마와 대가족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던 아이들을 떼어놓은 채 부모는 먹고사니즘에 올인했고, 정부도 성장이 급해 복지에 미처 눈을 돌리지 못했다.
급작스런 자본주의에 엄마와 대가족을 빼앗긴 이들은 분리공포로 인해 홀로 떨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어 관계를 회피하고, 이로 인해 타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더욱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홀로 있어도 함께 있어도 괴로운 처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돌봄을 제대로 받지못해 이런 고통에 처한 개인이 가장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숨는 것이다. 타인들 앞에 나서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지만 일단 숨는 것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 ‘은둔형 외톨이’가 증가하고, 자살률이 OECD 국가 평균의 약 2.5배에 달하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자살 전문가들은 만약 자살자가 속내를 터놓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자살을 실행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트라우마와 고립은 생명까지 앗아갈 정도로 위험하다. 고립은 생명을 앗아가는 문제로서만 아니라 개인의 행복권을 박탈하는 데도 심각성이 크다.
이미 성인이 된 이들이 다시 아기로 돌아가 엄마의 젖을 먹으며 안전 기지를 찾을 수는 없다. 그래도 이처럼 마을공동체를 안전 기지로 삼고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은 있다.
엄마에게 입은 상처를 가장 빨리 치유케 하는 이 역시 엄마다. 땅에서 넘어지면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한다. 엄마와 공동체를 잃은 트라우마는 엄마를 대신해줄 수 있는 공동체를 통해 회복할 수 있다.
엄마란 생물학적 마더만이 아니라 ‘따사로운 품’을 포괄한다. 엄마와 가장 유사한 품이 바로 공동체다. 인류는 실제 그렇게 마을에서 마당에서 대가족이 아이를 공동으로 길러왔다. 그 공동체가 바로 ‘사회적 엄마’다. 다시 아기로 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에 대부분은 사회적 엄마인 공동체를 통해 잃어버린 안전 기지를 되찾고 치유해야 한다.
이제 엄마들이 아기를 두고 일터로 나가는 일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아기를 위한다며 엄마를 아기 곁에 묶어둘 수도 없다. 오히려 오랜 세월 육아 부담을 홀로 감당해야 했던 직장맘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아이를 위해서도 ‘사회적 엄마’인 마을공동체가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5.자본주의는 혼삶과 각자도생을 부추긴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욕망과 불안을 먹이로 살쪄간다. 제국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중동을 집어삼켜 지배할 때 쓰는 기본 전략이 ‘디바이드 앤 룰(divide and rule)’이다. 즉, 분열하게 해서 힘을 분산시켜 개개인을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이 시대 인간을 노예화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서울을 보자. 인구는 줄어들지만 집은 갈수록 부족하다. 사람들이 집을 나가서 흩어지기에 더 많은 집이 필요하고, 집을 지어도 지어도 부족하다. 건축업자는 더 많은 집이 필요한 핵가족과 1인 가구화를 고대한다. 4명이 한 집에 살 때는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세탁기도, 가스레인지도, 헤어드라이기도, 청소기도 한 대면 됐지만 혼자씩 살면 모두 네 대씩 필요하다. 기업이 어느 쪽으로 유도할지는 자명하다. 혼자 살면 불안하니, 보험이나 연금을 들게 하기도 용이하다.
홀로 살면 생일날 ‘딩동’하고 알람을 울려주는 것도 인터넷 쇼핑몰이나 보험회사다. 외로움과 허전함을 소비로 메우게 한다. 기업들은 인간의 무의식적 습관까지 코딩화해 구매케 한다. 카드 내역을 파악해 소비 패턴을 읽어 자기보다 자기를 훨씬 더 잘 아는 기업의 마케팅을 개인이 당해내긴 어렵다. 텔레비전과 영화, 게임, 인터넷의 정보와 재밋거리는 얼마나 무궁무진한가. 이를 즐기는 동안 우리의 데이터는 낱낱이 자본가의 빅 데이터에 헌납되고, 이를 바탕으로 광고와 마케팅이 신 같은 위력으로 다시 나를 조종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핸드폰을 손에 놓지 않고, 카드 결제를 하는 이상 일거수일투족이 자본에 파악돼 그 노예로 살아가는 걸 피하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소비하고 즐기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자본에 복무하는 매스미디어의 최대 해악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프레임을 정해준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인생을 스타들을 모방하는 데 보내버리게 한다. 라캉의 말대로 남의 욕망을 내 욕망으로 착각하게 부추겨 소비하는 노예와 로봇을 만드는 것이다. 개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던 자본가들의 욕구에 충실하게 반응한 결과 세계 최고 갑부 8명에게 전 세계 하위 50퍼센트인 36억 명이 보유한 만큼의 재산을 안겨주었다. 국제구호기구 옥스팜이 2017년 다보스포럼 개막을 앞두고 발표한 ‘99퍼센트를 위한 경제 보고서’는 여왕벌이 바벨탑을 쌓는 데 죽도록 헌신하는 일벌들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마을과 공동체가 주는 최대 장점은 노예살이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사냥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히말라야의 산양들은 상위 포식자인 설표에게 사냥 당하지 않으려고 천 길 낭떠러지 위만 돌아다니며 생명을 유지한다. 마을이나 공동체는 벼랑 끝은커녕 가장 좋은 환경, 친절한 동지들이 모여 있는,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곳이니 피난처도 그런 피난처가 없다.
마을공동체살이란 부익부 빈익빈과 지구 황폐화를 가속화는 소비와 환경 파괴에 맞서는 혁명에 가담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만난 마을과 공동체 사람들은 이웃과 재밌게 어울리느라 인터넷이나 게임이나 텔레비전에 빠져 있을 틈이 없었다. 남한테 으스대려는 경쟁이 없어 부러움으로 사치를 부추기는 마케팅의 충동에 동요되지 않고, 쓸데없이 돈을 지출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혼삶이 대세가 되어가는 추세이지만, 홀로 살아가는 게 불리하다 것은 진화론자 다윈도 일찍이 간파했다. 다윈은 경쟁해서 승리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식의 적자생존을 언급한 바가 없다. 그는 서로 협력하는 것이 진화에 유리하다고 했다. 공동체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협력해 생존을 도모하는 데서 나아가 ‘함께 행복’해진다. 마을공동체살이의 이점은 개인도 행복하게 하지만,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행복은 개인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다. 개인적 이기심의 감옥을 뛰쳐나와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고래가 뱃속에 8킬로의 폐비닐봉지를 몽땅 담고 죽어 있다’는 뉴스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가엾다’는 한마디로 스쳐보내지만, 공동체 사람들은 그날부터 비닐이나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일회용품 안 쓰기를 실행한다.
6.함께해야 치유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세계질병평가’(GHE) 보고서에 따르면 2015년 말 기준 세계 우울증 환자는 3억2천200만 명이다. 세계 인구의 5퍼센트 가까이가 우울증 환자라는 이야기다. 나머지는 모두 건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삶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변화가 필요하며 치유할 때라는 신호다. 실제 공동체가 더 필요한 사람들은 현대 문명으로 인해 좌절을 겪고, 상처 입은 사람이다. 상처 입은 사람일수록 타인과 섞이는 걸 꺼려 숨어드는 게 문제다. ‘히키코모리’(은둔형 인간)가 되어 해결되는 건 없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동체의 주요 기능의 하나로 치유를 꼽는다.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자신을 꽁꽁 닫아둔 채로는 공동체에서 살아갈 수 없기에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해결된 거나 다름없다.
마을공동체는 돌담에 비유되곤 한다. 돌담을 쌓을 때 큰 돌은 큰대로 작은 돌은 작은 대로 자기 쓰임새대로 서로 의지하며 오목볼록을 채워주며 제몫을 하듯 마을공동체도 그렇다.
공동체 안에서 무엇이건 자기 역할과 쓰임새를 찾으면서 자기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는 열패감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회복해 치유의 길을 당당히 갈 수 있다.
공동체가 가져다주는 보다 본능적이고 본능적인 화학 작용도 있다. 공동체는 어디나 어린 아기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평소 아기를 가까이 해본 적이 없는 싱글이라 하더라도 귀여운 아기를 보거나, 아무런 선입견 없이 다가서며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옥시토신이 생성된다. 옥시토신은 모성 본능과 부부애 등을 촉진하는 사랑의 묘약이라고 불리는 호르몬이다. ‘돌봄’은 돌보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면도 있지만 실제 돌보는 본인을 가장 행복하게 해준다. 사랑의 묘약이 흘러넘치게 해주기 때문이다. 서울 수유동 밝은누리공동체에서는 싱글들도 30~40명 가량이 함께 사는데, 이들도 아기를 포함한 공동체원들과 어울리면서 대부분 결혼과 출산을 선호하는 쪽으로 변화된다고 한다. 서울 마포 성미산의 소행주나 도봉동 은혜공동체에서 만나본 청소년도 나중에 크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이런 공동체에서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냈다.
공동체가 치유력을 지니는 것은 사랑이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공동체 자체가 소통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서로 돌봄이 옥시토신을 많이 생성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여럿이 모여 서로를 응원하면 고가의 비용을 내야만 할 수 있는 정신과 상담이나 집단 상담과 같은 치유 효과를 체험할 수도 있다. 파주 문발동은 공동체가 아니라 마을 내에서 다양한 동아리가 생겨나 활기 넘치는 공동체 마을이 되어가는 곳인데, 합창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마을 사람들이 남녀 혼성 합창단 파노라마를 꾸려 주말마다 노래를 부르면서 느끼는 치유력이 크다. 이 마을엔 여성들만 하는 ‘천불퀸’이란 모임도 있다. 이 모임은 여성들 십여 명이 아이들을 재워놓고 밤 10시 이후 만나 새벽 3시쯤까지 얘기를 나눈다. 보통 생일이 된 사람을 천불퀸으로 모셔, 그가 최근에, 혹은 지금까지 사는 동안 ‘천불이 난’ 속내를 꺼내놓으면, 모두 그에게 공감하고 지지하고 응원하고 조언도 해준다. 그러면 십년 묵은 체증이 풀리듯 켜켜이 쌓아온 화가 녹는 체험을 한다. 마음속에 맺힌 원한을 풀어주는 현대판 해원굿인 셈이다.
이 마을에 또 하나 흥미로운 모임이 ‘영씨네마’다. 영씨네마는 주말 밤 8시 이후 2시간가량 각자 자유롭고 편한 자세로 영화를 본 뒤에 포도주를 한 잔씩 마시면서 얘기를 나눈다. 사랑 영화를 보고는 자기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사랑으로 입었던 상처를 고백하기도 한다. 지난번엔 가족 영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길버트그레이프>를 보았는데, 영화가 끝난 뒤 한 분이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대학 시절 등록금도 내지 못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면서 친구 집을 전전해 숙식을 해결하고 겨우 대학을 다녔던 삶을 고백했다. 그는 결혼을 해서도 늙은 부모와 아이들까지 모두 책임지며 살아온 가장으로서 고단한 삶을 고백해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함께 울어주는 공명만큼 한을 풀어주는 것도 없다. 평생 혼자 짐을 지고 사느라 힘들었던 무거운 짐이 동조의 눈물 속에서 녹아내리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공동체는 내적 상처나 감정적 앙금을 해소하는 데 적극적이다. 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 작은 균열이 결국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폭력 대화법 같은 배려의 대화는 기본이다.
요즘처럼 변화가 급속한 시대엔 어디 가나 세대 간 불통이 큰 문제다. 한마디로 코드가 다를 뿐 아니라 같은 한국어도 세대가 다르면 통하지 않을 때가 많다. 또래끼리 모이는 동아리와 달리 마을에선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세대가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교감과 소통, 조율의 문제가 더 필요하다. 여러 세대가 함께 지내다 보면 정서적 밑바탕이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는 속도에도 차이가 있어 오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을공동체들은 소통을 위한 기법들을 배우고 실행한다.
서울 도봉동 은혜공동체의 경우 관계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나 갈등을 해결하는 데 소그룹 토론과 심리상담을 활용한다.
박민수 대표는 상담전문가인 아내의 도움으로 심리 상담을 공부하며 일대일 상담에 집중했다. 한 명 한 명의 상처까지 껴안느라 건강이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심리상담은 놀라운 치유력을 보여주었다. 또 일부 공동체원들 간의 갈등까지도 해소돼 소통되는 변화를 가져왔다.
또 은혜공동체에서는 누구에게나 ‘가톨릭의 대부’와 같은 목자가 있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목자와 상담을 한다. 아이들도 부모 외에 멘토가 정해져 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다. 속의 말까지 터놓고 얘기하는 시스템이 있어 심리적인 걸림돌이 해소되다 보니, 공동체원들은 시간적으로는 좀 더 많이, 공간적으로는 좀 더 가까이 있고 싶어 한다.
함께하는 것은 변화를 촉진한다. 감자와 고구마 당근을 씻을 때 한 바가지에 넣고 씻으면 서로 부딪치며 빨리 씻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게 씻기는 과정은 좀 더 세련되고 원만해지는 과정이자 아픔의 여정이기도 하다. 부딪침, 즉 갈등을 무조건 미봉하려는 것은 성장에 좋은 방식이 아니다. 공동체 밖에서 이웃 간에나 친구 모임, 직장에서도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하며 문제는 그냥 덮고 가고자 한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이다. 괜히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경험칙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속 깊은 애기를 하는 게 이상한 하지않는 의례적인 사이에서는 그런 게 일상적이다. 그러나 공동체엔 늘 함께 살아가야 하기에 앙금을 미봉해버리면 더 큰 사달이 날 수 있다. 보기 싫으면 안 봐도 되는 이들이 아니다. 함께 잘 살아보려고 작정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갈등을 성숙의 여정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속마음을 풀어내는 대화를 통해 상대가 무엇을 아파하고 무엇에 불안해하는지 충분히 듣지 않고, 그냥 덮고 넘어가면 피상적인 관계 그 이상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혈육도 마찬가지다. 아픔까지 한번 얽혀서 껴안아본 사이가 아니면, 사소한 것에 빈정이 상하고, 불편해질 수 있다. 한 번이라도 깊게 대화하고 상대를 깊게 이해하고 나면 오랫동안 그토록 못마땅하게만 보였던 상대의 행동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가령 늘 만나는 사람 중에 심한 사시가 있다고 하자. 그는 대화 중에도 엉뚱한 곳을 보는 것 같다. 눈동자가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상태를 정확히 모른다면 말을 할 때마다 ‘저 사람은 내가 이야기하면 왜 내게 집중하지 않고 늘 딴 데를 쳐다보지’라며 불쾌할 것이다. 갈등과 오해는 내 진심을 알릴 기회이자 상대의 진면목을 진심을 알 수 있는 기회이다. 상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모든 갈등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네가 진짜 아파하는 것은 무엇이고,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뭐냐’를 알아가는 장이라는 점이다.
갈등은 진정으로 친밀해지기 위해 서로 잘 소통하며 장애물을 치우는 과정이나 다름없다. 장애물이 있음에도 없다고 하며 그냥 살자고 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합심해서 치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문제가 있음에도 대충 참고 사는 게 아니라 갈등을 거쳐 해결해가며 친밀해질 필요가 있다. 이렇게 나아갈 때 의례적인 모임에서 나누는 피상적인 대화와는 깊이가 다른 공감과 위로와 심리적 보살핌이 되면서 행복감을 충만하게 해준다.
7.개인과 사회 문제의 해법이 마을공동체에 있다
마을공동체는 주거, 비혼, 출산, 육아, 교육 등 우리 사회 가장 골치 아픈 문제와 직결돼 있다. 간디는 평생 마을공동체에서만 살았다. 인도의 독립보다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간디는 ‘마을공동체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했다. 마을공동체는 국가적 과제 난제들을 해결에도 큰 영감을 줄 것이다. 누군가는 고독사도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한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시스템과 복지는 강화될수록 좋지만, 모든 것을 국가가 해결하기도 어렵거니와 그에 따른 엄청난 예산과 세금 부담을 감당해내기도 어렵다. 일차적으로 공동체가 서로 의지하며 돌보는 사회야말로 가장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다. 행정 비용과 복지 예산 10억으로도 만들기 어려운 ‘행복한 마을’을 마을 사람들의 자발적인 협력으로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도 만들어내는 게 마을공동체의 신비다.
두렵고 험난한 세상의 모든 파고를 홀로 넘어야 하는 것만큼 큰 재난은 없다. 개인을 옥죄는 게 자본만은 아니다. 누구나 살면서 몇 번쯤은 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이럴 때 하소연하고, 물어보고 도움 받을 사람 한명 없는 세상이 지옥이 아니겠는가. 힘든 일이 있을 때 함께 걱정하고 내 일처럼 나서주고 도와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 즉 힘겨운 세상에서 내 편인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천국이고 극락이 아니겠는가.
진짜 재난은 쓰나미나 지진이 아니라 몸이 아플 때, 혼자 죽어갈 때조차 모든 고통을 온전히 홀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목숨을 다하는 순간 누군가 곁에 있고, 함께 아파하는 이가 있다는 것만큼 큰 위로가 있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약함이 있다. 그리고 늘 만생명과 만물에 의존해서 숨쉬며 먹고 살아가고 있다. 홀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의지하고 돌봐주고 사랑해주고 지켜주는 공동체적 삶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