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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 사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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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사람들.jpg

 

책 표지-.jpg 몇년 전 브루더호프공동체인 미국 우드크레스트에 딸과 함께 머물며 그들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가슴으로 공감했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와 디지탈 가공 세계의 쓰나미가 세상을 삼키고 있는 와중에서 브루더호프는 노아의 방주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선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다른 문제일 뿐이라고 여겨 신앙을 그저 삶의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적지않다.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에 대한 순응, 또 신앙과 삶의 이분화를 당연시하는 풍토가 지배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우드크레스트에서 지내면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삶과 신앙의 일치였다.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손자로 브루더호프의 장로였던 크리스토프 할아버지를 비롯한 형제들과 지내는 동안 공동체라는 것이 어떤 교리나 명제가 아니라 가슴에서부터 나오는 따사로움과 눈빛, 연민, 자애, 하나됨이나 노동과 실천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들이 쓰나미에서 자신들만이 안전한 방주에 피신했다는데 자족하지 않고, 시리아와 네팔 등 재난으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형제들을 파견해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었다. 자신들끼리만의 행복한 공동체에 그치지않고, 지상 공동체를 위해 소명을 다하려는 고군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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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루더호프 공동체 창시자로 이번에 발간된 <공동체로 사는 이유>(비아토르 펴냄·김순현 옮김)의 저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1883~1935)의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다. <공동체~>는 아놀드가 1925년 <치커리>라는 잡지에 ‘고백’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이다. 책으로 엮기엔 아주 짧은 글인데, 이 글에 대해 가톨릭 트라피스트 수도회 소속 신부이자 20세기 가톨릭의 대표적 영성가의 한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머튼(1915~1698)이 해설을 썼다.
 아놀드는 1920년 작가로서 장래가 보장된 직업과 베를린의 중 상류층의 특권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독일 중부 지방의 작은 마을인 자네르츠로 옮겨 산상수훈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세워 장애인과 고아 등을 돌봤다. 히틀러의 전쟁과 살육, 폭력에 반대하다 박해를 피해 피신중 부상을 입고 수술을 받다가 사망한다. 그 이후 브루도호프 공동체원들은 영국으로 피신해 영국에 브르더호프를 설립했고,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전세계 20여곳의 공동체에서 무소유와 비폭력,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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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놀드는 ‘왜 공동생활인가’란 제목의 글에서 “모든 생명은 공동체로 존재하며 공동체를 근거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동체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밝혔다. 아놀드는 공동체 건설의 핵심을 ‘믿음’으로 보았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맹자의 성선설과도 통한다. 즉 욕망과 감정에 부초처럼 표류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진리와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은 인간을 사회적 관습이나 결점에 의거하여 평가하지 않고, 배금주의와 비열함과 흉악함으로 얼룩진 인간 사회의 이 모든 가면이 거짓임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믿음은 인간 개성의 현저한 사악함과 변덕스러움이 인간 본래의 결정적 속성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다른 견해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신의 현재 본성만으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 감정의 기복과 동요, 육체적·심리적 만족을 탐욕스레 추구하는 성향, 신경과민과 야망의 심리적 동인, 타인에 대한 영향력 추구, 인간의 모든 특권은 진정한 공동체 건설을 막는 장애물이지만, 인간은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믿음은 이런 탐욕적 성향과 성격적 결함이라는 사실적 여건이 결정적인 것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하는 허구에 굴하지않는다. 그것들은 하님의 능력과 모든 것을 극복하는 그 분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이 현실보다 강하시다. 공동체를 건설하는 힘인 그분의 영이 모든 것을 이겨 낸다. 여기서 분명해지듯이, 궁극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공동체의 형성과 공동생활의 실질적 구축은 배제되고, 아무리 성가셔도 인간 안에 실제로 존재하는 선이나 법의 강제력을 신뢰하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은 악의 실재에 부딪혀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아놀드는 “선의 궁극적 신비에 대한 믿음,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만이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공동체 생활의 시도를 통해서만, 거듭나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삶을 영위하는지, 어떻게 하나님이 삶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 즉 공동체를 형성하는 능력이되시는지를 분명히 알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체야 말로 사회·정치 문제에 대한 해답”이라면서 “자유와 일치,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지만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해 정반대의 집단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투쟁은 함께하지않고, 오직 행동과 말을 일치시키는 단 하나의 무기인 사랑만으로 오늘의 타락한 상황에 맞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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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해설한 영성가 토머스 머튼 신부는 ‘공동체에는 개인의 성취와 친목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밝혔다. 토머스 머튼은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이 사막의 교부 두 사람이 ‘우리도 한 번 다투어 보자’고 ‘다투기 위해서는 소유욕 곧 무언가를 독점해 다른 이가 가지지 못하게 하는데서 비롯되니 주위에 있던 벽돌 두 개를 놓고 다투기로 해보자’고 한 일화를 소개했다. 일화에서 한 교부가 ‘이건 내 벽돌이요’하자 다른 교부는 ‘그래요, 형제님, 그게 형제님 벽돌이면, 형제님이 가지세요’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토머스 머튼은 “사람들이 다투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보다 재물을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며 “재물을 초탈한 상태, 곧 청빈이 중요한 이유는 물질의 방해를 받지 않아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토머스 머튼은 “우리가 사랑하고 헌신해야할 사람이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다”고 한다. 그는 “우리는 곧잘 우리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만을 우리의 이웃으로 여기곤 하는데, 이는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더 있음을 알지 못해서”라며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사랑해야 하고, 공동체는 우리 자신의 공동체 너머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공동체의 기초는 민족성도 계급도 아니다”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차별이 만들어낸 적대 행위를 십자가 위에서 온몸으로 무효화하셨기에 우리는 차별하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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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도 브루더호프처럼 고군분투하는 밝은누리공동체와 은혜공동체, 오두막공동체, 민들레공동체, 사랑마을공동체 등 기독교공동체들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공동체적 고군분투는커녕 인간 자체를 귀찮아하며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문화가 대세로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 가장 효율적으로 계란을 생산하기 위해 A4용지 한장 크기의 케이지에 갇힌 양계용 닭들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철망을 치고 스스로 케이지에 갇혀 스마트폰으로만 소통하는 모습은 ‘나’보다 ‘우리’가 익숙했던 한국사회에서 불과 반세기 전만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상황이다. 한국은 이제 전세계에서도 디지털 의존도가 가장 높아 어느 곳에서나 스마트폰에만 코를 박고, 가까이에 가족과 동료들이 있어도 하나같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느라, 인간과 인간의 접촉이 줄어드는 매트릭스 세계로 빠르게 전환되어가고 있다.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혼인율과 출산율은 떨어지고, 1인가구 비율은 가장 빨리 상승하며, 초고령화는 가장 빨리 진행되고 있다. 거대자본에 의해 조종되는 매트릭스에 의해 공동체는 뿌리부터 뽑혀나가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이 멀어질수록, 창조질서가 맘몬의 지배 질서로 바뀔수록 원래의 에덴동산을 회복하려는 갈망도 커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한국 기독교에는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희망을 모아 현실적 방주들을 수백개, 수천개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과 신앙의 열정이 있다. 한국기독교는 구한말과 일제의 어둠 속에서 한민족 공동체를 위해 인도주의적 봉사와 교육과 시민사회에서 횃불을 들었던 역사가 있다. 그런 초기 기독교인들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이제 맘몬에 순종하는 기로에 서있지만 말이다. 그 한국 기독교가 이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통해 다시 깨어나 위기의 민족공동체를 위해 다시 한번 횃불을 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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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음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세계 어느 곳보다 공동체성의 붕괴로 자살율과 존속살해율, 노인 빈곤율이 가장 높을만큼 어둠이 깊기에 역설적으로 공동체운동의 찬란한 횃불이 타오를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이기도 하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동방의 횃불 코리아>에서 노래했듯, ‘마음에는 두려움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지식은 자유스럽고, 좁다란 담벽으로 세계가 조각 조각 갈라지지 않는 곳’인 그런 코리아는 정부나 거대 자본에 의해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씨알들이 만들어낼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로 응원하고 위로하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우리 함께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만들어갔으면 한다.

 

*사진들은 부르더호프 공동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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