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역사저널 그날> 연암 박지원 편에서 갈무리
1. 마을의 어린아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쳐주다가 아이가 읽기 싫어하는 것을 나무랐더니, 하는 말이 “하늘을 보면 새파란데 하늘 ‘천’자는 전혀 파랗지가 않아요. 그래서 읽기 싫어요”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은 창힐(蒼頡)이라도 기가 죽게 만들거요.
2. 하늘과 땅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끊임없이 생명을 낳고,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롭다.
3. 어저께 비에 살구꽃이 비록 시들어 떨어졌지만 복사꽃은 한창 어여쁘니, 나는 또 모르겠네. 저 위대한 조물주가 복사꽃을 편들고 살구꽃을 억누른 것 또한 저 꽃들에게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문득 보니 발(簾) 곁에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 誨汝知之 知之爲知之’(내가 너에게 앓에 대해 가르쳐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고 하는 것이다)라 하는 것 아닌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네가 글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바둑이나 장기도 있지않느냐?’ 그나마 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라고 했네.
위
세 글은 모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글이다. 1번 글은 당대의 라이벌 문인 유한준에게 보낸 편지고, 2번 글은 56세에 지리산과 덕유산을 낀 안의현감으로 제수되어 4년간 지내면서 쓴 글이다. 3번 글은 제비와 장난하며 소일하는 일상을 박남수에게 보낸 글이다. 글쟁이라지만 글감옥에 갇히지않고 때로는 글을 희롱하고, 때로는 글과 사물이 몰아일체의 경지로 노닐게 하는 것이 과연 조선 제일의 문장가로 할만하다.
수많은 문집에서 옥석들을 골라 실은 책이 나왔다. <문집탐독>(역사공간 펴냄)이다. 신문 기자이자 고전번역가이기도 한 조운찬 작가의 신간이다. 이 책에는 연암의 글만이 아니라 대표적인 문장가들의 29명의 문집을 담아냈다. 흔히 옛 문집을 읽는다는 것은 박석에서 옥돌을 골라내는 작업에 비요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으로부터 한문학의 대미를 장식한 정인보에 이르기까지 1200여년 문집으로 옥돌들을 가려서 선보인 것이다. 이를 보고 우응순 고전번역가이지 인문학자는 “기자들이 이런 깊이 있는 책들을 내니 전문가 연 하는 이들이 자극을 받지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그런데 조운찬 작가는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과 베이징특파원을 지낸 기자지만 단지 기자로만 볼 수가 없다. 그는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공부했고, 20년 전 외환위기 때는 신문사를 떠나 민족문화추진회(한국고전번역원 전신)에서 국역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는 한문고전 번역가이기도 하다. 그는 당시 문집 번역 원고를 교정하는 일을 맡았는데, 처음엔 문집의 방대함에 놀랐고, 그 다음에는 문집 속의 다양한 콘텐츠에 놀랐다고 한다. 그러면서 많은 독자들이 문집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 때 품었던 생각을 출간작업으로 옮겼다.
29명의 대표 문집가들을 한구슬로 꿰면서 이를 분야별로 정리한 것은 기자적 감각을 발휘한 것이다. 가령 1부에선 △최치원의 <계원필경집>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이제현의 <익재집> △장유의 <계곡집> △박지원의 <연암집> △정인보의 <담원문록>을 ‘고품격 문장을 쓴 우리 문학사의 별들’로 묶어냈다. 이어 2부 ‘끝내 세상을 바꾸어낸 치열한 연구자들’에선 △의천의 <대각국사집> △이이의 <율곡집> △신흠의 <상촌집> △이항복의 <백사집> △김육의 <잠곡유고> △이의현의 <도곡집>을, 3부 ‘새로운 생각의 가능성을 열어준 안내자들’에선 △허균의 <성소부부고> △김원행의 <미호집> △홍대용의 <담헌서> △박제가의 <정유각집> △김정희의 <완당전집> △심대윤의 <심대윤전집>을 정리했다. ‘부조리한 세상에 당당히 저항한 문장가들’은 4부에 묶었다. △백평년 외 <육선생유고> △김시습의 <매월당집> △최립의 <간이집> △양득중의 <덕촌집> △윤기의 <무명자집>이다. 대미는 △정도전의 <삼봉집> △권근의 <양촌집> △김성헌의 <청음집>과 최명길의 <지천집> △김윤식의 <운양집> △황현의 <매천집> △김택영의 <소호당집>을 ‘격변기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 인재들’로 묶었다.
삼월 심일일에
아침거리 없어
아내가 갖옷 잡히려 하기에
처음엔 내 나무라며 말렸네
추위가 아주 갔다면
누가 이것 잡겠으며
추위가 다시 온다면
올겨울 난 어쩌란 말이오
아내 대뜸 볼멘소리로
당신은 왜 그리 미련하오
그리 좋은 갖옷 아니지만
제 손수 지은 것으로
당신보다 더 이낀다오
허나 입에 풀칠이 더 급한 걸요
(…)
-<옷을 전당 잡히고 느낌이 있어 최종번 군에게 보이다(與衣有感 示崔君宗藩)>
글은» 조운찬 기자 겸 작가그냥 글이 아니다. 그의 삶의 내공을 담아낸 글들이 뭇 사람들의 눈물을 훔치게도, 두 주먹을 불끈 쥐게도 한다. 그것이 글의 보이지 않는 힘이다. 위 글은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이규보(1168~1241)의 시다. 조작가는 그에 대해 “이규보는 가난을 숨기지 않았다. 가죽 옷을 전당 잡혀 쌀을 구할 정도로 궁핍했지만, 긍정적인 사고로 대처하려 했다”고 평했다. 이규보는 자신의 시가 8천 여수에 달한다고 밝혔고, <동국이상국집>에만 2088수가 실려 있다. 그렇게 다작이면서도 하나 같이 수준급이라고 한다. 이규보는 ‘3첩(捷)’으로 불렸다고 한다. 걸음이 재고, 말이 빠르고, 시를 빨리 지어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 책에선 문집만 탐독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역사적인 그 인물의 이면까지 엿보는 맛이 쏠쏠하다.
<익재집>은 700년간 21쇄를 찍은 베스트셀러 문집이라고 한다. 지은이 이제현(1287~1367)은 고려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북경으로 사신을 가서 27세부터 36세까지 긴 세월을 대륙에서 보내며 수많은 기행시를 남겼다.
명망이 천하에 넘쳐흘렀다. 몸은 고려에 살았는데, 도덕과 문장이 유학의 종장이었다. 모두 한유처럼 우러러 존경하였고, 주돈이처럼 상쾌하고 깨끗한 기상이 있었다.
고려 말 문익 목은 이색이 이제현의 묘비명에 쓴 글이다. 통일신라시대 최치원이 세상과 불화하며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스러져간 반면 이제현은 문학·학문·정치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비루하고 졸렬하여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이 그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짓는 것을 본업으로 삼아왔다. 그러니 평소에 이런 일을 빼놓으면 마음을 쓸 곳이 없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장유(1587~1638)가 <계곡집>을 간행할 때 <계곡만필> 서문에 쓴 글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겸허하게 표현했지만, 당대의 평가는 달랐다. 장유가 세상을 뜬 직후 <인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람됨이 순수하고 그 문장의 기운이 완전하고 이치가 분명하니 세상에 그에게 미칠 이가 없다. 문형을 두 차례나 맡아 공사의 문서 제작이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고, 천관(인사를 담당하는 이조)에 오래 있었으나 항상 문 앞이 쓸쓸하여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사람들에게 명망이 있었으며, 조금도 그를 헐뜯는 이가 없었다.
장유는 올바른 학문은 잡학이 성행한 가운데 찾아진다고 했다. 오곡이 돋보이는 것은 돌피와 함께 있을 때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학문이 융성할 때 정학은 더욱 존재감을 갖게 된다. 그의 융통성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또 말보다 글을 강조했다. 문인의 면모다. 그가 당나라의 뛰어난 문장가 선공 육지를 예로 들어 ‘문인의 붙끝에 혀가 달려있다’는 표현도 아래 그의 글에서 나왔다.
<주역>에 이르기를 “글로는 말하고 싶은 생각을 다 기록하지 못하고, 말로는 가슴속의 뜻을 다 표현해내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고 하였다. 마음속의 정미한 뜻은 입으로도 제대로 표현해 낼 수가 없는 것인데, 붓으로 표현하기란 얼마나 어렵겠는가. 옛사람의 말에 “육(陸)선공(宣公)은 입으로 잘 표현해내지 못할 것을 붓으로 휘갈겨 쓴다”라는게 있다. 이는 육 선공은 입으로도 불가능한 것을 글로 곡진하게 표현했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붓끝에 혀가 있다’(筆端有舌)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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