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저녁,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피곤했는지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날카롭게 다투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두 젊은 남자였다. 대충 내용을 들어보니, 한 사람이 자리를 넓게 차지하고 앉은 것에 대해 다른 사람이 불평을 터트렸고, 이에 처음 사람이 짜증스레 반응하면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었다. 다행히 험한 소리는 나오진 않았지만, ‘여기까지가 내 자리다. 아니다’ 하며 작은 말싸움이 이어졌다. 그렇게 자리를 놓고 서로 다투는 그들을 바라보는데, 문득 다석 유영모 선생의 말씀이 떠올랐다. 누가 어디서 사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우주에 삽니다.”
언뜻 생각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하고 엉뚱한 말 같기도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다. 우주라는 것이 지구 바깥 어딘가에 멀리 따로 있는 시공간이 아니고, 지구가 우주의 부분이고 그 안의 우리도 우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거기가 바로 우주요 우리가 사는 곳이다. 그 버스 뒷좌석도 우주의 한 조각이다. 그런데, 그토록 무한하고 광대한 우주에서 살고 있는 두 ‘우주적 존재’가 좁은 버스 안에서 각자의 반경을 주장하며 티격태격 다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한심하거나 안쓰럽게 느껴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내가 아프게 느낀 것은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구처럼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두 사람 다 언제나처럼 그날도 학교 또는 일터에서 고단한 하루를 보냈을 것이고, 일상의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고, 그래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할 마음을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나도 다를 바 없다. 같은 상황을 겪었다면 겉으로 표현은 안했겠지만 속으로는 욱하며 짜증을 냈을 것이다. 아니면 은근히 무릎에 불만을 나타내는 힘을 실어 남을 밀어내거나 버텼을 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해 타인만이 아닌 자기 자신과도 경쟁하며 살아가다보니 우주를 자각할 여유도 우주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돌아볼 여력도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더 외로워지고 더 괴로워질 뿐이다.
다니카와 슌타로는 우주가 일그러져 있기에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고 한다. 삶이 고달플수록 인간은 서로를 더 원하고 필요로 하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버스 안의 상처 입은 우주를 보며 가슴이 무거웠는데, 위로하듯 격려하듯 어린 시절 노래처럼 외웠던 천자문 구절이 생각났다.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宇宙洪荒).” 우주는 넓고 거칠다는 뜻이다. 옛사람들은 그렇게 우주적 사유를 하며 글을 배우고 익혔다. 아무튼, 드넓은 우주 공간을 함께 여행하는 우리가 서로를 받아들이는 삶의 반경을 한 뼘만 더 넓혀 보면 어떨까? 거친 우주의 시간을 함께 통과하는 이들끼리 서로에게 약간만 더 친절하면 어떨까? 그러면 일그러진 우주가 바로잡히고 우리의 우주여행도 조금은 더 평화로워지고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