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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나의 영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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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지팡이

 


1

"나에게는 우상은 없다."  나의 십계명 일 조다.
그러나 닮아보고 싶은 영웅들은 주위에서 가끔 만난다.
그들은 책이나 드라마 속에서 반짝거리는
별 같은 존재들이 아니다.
진흙탕 속 같은 삶의 현장에서 빛을 잃지 않는  
무명의 다이아몬드 같은 존재들이다.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사람,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사람
........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게 하는 사람"

 

-랄프 왈도 애머슨의 "성공이 무엇인가"에서-

 

 

2

며칠 전에 내 영웅 한 분과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재수에 불이 붙은 날이다.

J 박사, 1928년 생, 향년 85세. 나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22년 대선배다.  
미국 명문 조지타운 의대 병리학 교수, 한국 H 의대 학장, 교회장로.
부인도 역시 내과 의사. 장남은 메이시 백화점 부사장, 차남은 군의관 대령.


세상 누구나 부러워할만 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그가 나의 영웅이 된 것은 그런 개인적인
명예나 지위, 영달 때문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영어로 "Good for you!"일 뿐, 나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내가 그 분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분의
단순한 평범함 때문이다.

언제 보아도 얼굴에 잔잔히 흐르는 인자한 미소,
몸에 배어있는 겸손하고 소박한 체취, 그리고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한 유머...... . 그는 한 마디로 평범한 시골 촌부다.

나는 그런 범부적 평범함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남보다 뛰어난 비범함이라는 것이 별건가?
웬만한 머리로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비범함이다. 적당한 환경과 여건만 주어지면...

그러나 교육이나 지적 노력만으로 성취될 수
없는 것이 평범함이다.
산전수전 온갖 인생의 체험들이 삶 속에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물처럼 흘러나오는 것이 평범함이다.   


식사대화 중에 J 선배에게
"여태껏 사시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하고 물었다.
"글쎄,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심각하게 해 본 적이 없는데..."
하는 대답이 거침없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솔직한 말이다.  사실, 평소에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기에도 바쁜
이 각박한 세상에.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느냐? ""무슨 꽃을 가장 좋아하느냐? "하는
질문처럼 청소년 시절에나 주고받을 수 있는 유치한 질문이지.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식한 질문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시면 선배님께서 지난 인생을 뒤돌아보시며 
아쉬웠거나 후회하는 일들은 없습니까?"하고 다시 물었다.

"그런 것들도 별로 없어. 내가 행운아여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
"그래도, 몇 마디만 꼭 해 주십시오."
"나의 남은 인생에 참고하고 싶어서 그럽니다."하고
그를 다그쳤다.

죽음을 앞 둔 수백 명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며
평생 죽음을 연구했던 엘리자벳 퀘불러 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인생수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죽어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동안 인생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며 살았다.
아니면 남의 눈치를 보며 자신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못해 봤다.'고 후회를 한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죽을 때
눈을 감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아닙니까?"  
..........

J 선배는 물 컵을 들어 천천히 마셨다. 그리고

"죽기 전에 남들이 하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는데....
아직도 못 해 본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하고
약간 힘없는 목소리도 대답했다. 

"구체적인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십시요".  끈질기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

"영화나 드라마에서 예쁜 여자들을 보면
저런 미인들과 한 번만 살아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수줍은 목소리에 얼굴빛까지 붉어졌다.

대부분 사람들이 죽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섹스를 생각한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J 선배는 역시 평범한 사람이다.

 

영화은교노인.jpg 

*영화 <은교> 중에서

 

3

몇 년 전에 J 선배 부인의 부음을 알리는 부고가
나에게 전달되었다.
조의금과 조화는 일체사절.
부조을 하고 싶은 분들은 그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해 주셔도 좋습니다.

아주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내가 동창회 일을 맡고 있을 때라서
내 화환만은 사정사정을 해서 고별예배 장소에
어렵게 들여보낼 수가 있었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고 J 박사가 단상에
올라가 부인에 대한 이런 조사를 시작했다.

"저는 장로지만 솔직히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없습니다.
내 부인은 나보다도 기독교 구원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현재 천국에 가 있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죽기 바로 직전에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입으로 시인만 하면 천국에서 가서 예수님 우편에 앉을 수 있다고
떠벌이는 싸구려 천국이 아닌가?
도대체 무슨 말을 꺼내려고 하는 것일까?
조문객들은 잔뜩 긴장해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 처는 평소에 웃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매사에 너무 심각했었지요.
특히 뼈암(BONE CANCER)을 앓았던
지난 몇 년간은 얼굴에서 미소의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임종한 날 밤이었습니다. 그녀는 통증을 견딜 수가
없어서 잠을 못 이루고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전광석 처럼 스쳐갔습니다.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두려움에 스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여보!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하나 있어.
혹시 나보다 당신이 먼저 하늘나라에 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하늘나라에 가면 다른 남자들에게 곁눈질을 하지 말고
나를 기다려 줄 수 있겠어? 내가 곧 뒤따라갈께... .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큰 소리로 깔깔 웃기 시작했습니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인
아내의 파안대소하는 모습이었습니다.

......

그리고 몇 시간 후에 그녀는 내 손을 잡으며
편안한 얼굴로 운명했습니다."

장례식장의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겁고 침울한 장례예배 분위기가 한 순간에
웃음꽃이 만발한 천국환송축제로 변해버린 기분이었다.

어느 화사한 봄날 오후처럼 따뜻했다.

 

 

4

부인이 세상을 떠난 몇 달 후,  J 박사를 친구 집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J 박사 위로하기 위한 몇  지신들의 단출한 모임이었다.
그는 내가 예전에 알고 있었던 모습이 아니었다.
외로움과 고독으로 찌든 어둡고 초췌한 한 노인장이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해 보인,
적어도 10년 이상은 그 동안 늙은 듯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쿡 했다는 된장국 한 뚝배기를
손에 들고왔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부인의 묘소를 찾아가 잡초도 뽑고 묘비도
닦는다고 근황을 털어 놓았다.

그녀에 대한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외로움에서 나온 그리움 때문일까? 암튼
무척 지쳐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 J 선배보다 나이가 4살 위인
P 선배로 부터 J 선배에게 젊은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그의 인품과 경륜, 경제력으로 봐서
여자들이 줄을 서서 탐낼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달 후에 한 동창회 모임에서J 박사와 우연히
마주쳤다.
온 몸에 생기가 넘치는 아주 딴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시던데. 그렇게
행복하십니까"하고 진담 반 농담을 내가 꺼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P지? 그 친구는 입이
싸서 문제란 말이야"하며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사랑은 이른 봄에 피어나는 한 송이 장미 꽃과 같은
존재지....

 


5

그리고 몇 년 후인 며칠 전에 그를 다시 만났다.
한 손에  T 자 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왠 지팡입니까? 한 번 반져볼 수 있을까요?"
나는 지팡이를 건네받아 손잡이 부분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우리 집 안방 머리맡 하얀 벽 위의 나무 십자가
바로 밑에 걸려있는 나무 지팡이와 유사했다.
어머니가 막내아들인 나에게 남기고 간
유일한 유산, 어머니 지팡이.......

포근하고 아늑했다. 어머니에 대한 감미로운 추억들이
나의 전신, 영혼을 아침이슬처럼 적셔나가고 있었다.
취기에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만든 지팡이야. 처의 묘를 오고가는
숲길에 있는 한 아름다운 나뭇가지를 보고
지팡이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만든 거야.
주위 노인들이 만져보며 무척 부러워했지.
그래서 30여 개를 더 만들어 노인들에게 선물을 했어.
그 노인들이 나를 Cane Man( 인간 지팡이) 라고
부르지.
Cane Man 이 동네사람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 되어버렸지."하며 환하게 웃었다  


"혼자 살기가 외롭지 않으세요.(?)
여자 친구와 결혼해서 함께 사시면
서로 의지도 되고, 덜 외로우실 텐데..."

"주위에서 그렇게 권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녀도 그걸 원하기도 하고"

.....     


"그런데 그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가 않아. 아무래도
그녀가 늙은 내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야 할 텐데.

다른 한 가지는 나는 천국은 몰라도
하늘나라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믿고 있어.
죽어서 그녀를 죄스럽고 쑥스러운 표정으로 만나고
싶지 않거든...." J 선배의 말이 거대한 바위처럼
내 가슴에 다가섰다.
J  선배 얼굴에 생기 찬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오후 5시, 뜨거운 여름 햇살이 기가 꺾이며
조금씩 부드러워 지고 있었다.
J 선배와 이별이 아쉬웠다. 마지막 만남일지도 몰라..
해를 무작정 중천에 매달아 두고 싶었다.

"커피라도 한 잔 더 하시고 가실래요? 하고 물었다.
"아니야, 어둡기 전에 집에 빨리 돌아가야지.
밤눈이 어두워서 어두워지면 운전을 할 수가 없어"
미소 짓는 입가에 짙은 회색 외로움이 스쳤다.

"다음에 또 봐요, 나의 영웅!"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기약이 없는 약속이라는 것은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래, 인생은 흑백으로 그려가는 그림이 아니야.
수천, 수만 가지 색깔들로 그려가는 총천연색 그림이지.

나의 영웅들은 그런 그림 속에
조화와 균형이 되어주는 조그마한 점들이지.

자신이 한 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게 하는......,

 


박평일
저는 1949년 생으로, 서울에 있는 경복고을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농업경제학을 전공 했습니다. 미국에는 1977년에 이민와서 여러가지 사업을 하다가 20년전 부터 위싱톤 지역에서 부동산감정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당당뉴스(dangdangnews.com)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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