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자비,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은 복되나니
» 인권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 수감중 법정에 가면서도 만면에 웃음을 잃지않은 이돈명 변호사
얼마 전 이희호 여사가 돌아가셨습니다. 국민과 남북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마지막 말씀이 있었답니다. 민주주의와 평화, 여성, 장애인등 평생 이웃을 위해 애쓴 분 유언답습니다. 임종 때 가족들이 부르는 찬송가를 따라하려고 희미하게 입술을 움직이다 평화로이 가셨다니 참 복 받은 게지요.
10여년 전 가신 이돈명 변호사 마지막 모습도 그렇게 평화로웠습니다. 소식을 듣고 바로 댁으로 달려갔는데 저녁 잘 드시고 주무시듯 가셨더군요. 변호사님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인권, 시국사건을 변호하다가 급기야는 감옥살이까지 했으니 마지막 평화로움으로 그 보상을 받은 걸까요. 평생 자가용 차 한번 가지신 적이 없고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전철을 타고 다니셨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자비롭고 화평케 하는 사람들이 받을‘복’이란 게 그냥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바로 그 복일까요? ‘안 아프고, 돈 잘 벌고, 부모 자식 간 가정 화목하고, 사람들 칭찬받고, 죽을 때 고생 안하고’하는 그 복. 여기다 더 욕심내면 ‘구원받아 죽어서는 하늘나라 가는’복.
이제는 장가갈 나이가 된 우리 아들 녀석 첫 영성체 본명 지을 때도 그랬습니다. 나는 처에게 아들 본명을 ‘토마스 모어’로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는 영국 헨리 8세 때 최고 법관이자 재상이요 사상가로 <유토피아>라는 저서를 남겼지요. 세속(世俗)적 기준으로 남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지만, 세속의 욕심에 빠지지 않고 내면의 자유를 누렸던 성인이었습니다. “세속 안의 자유”. 한스 큉 신부는 그의 삶을 이렇게 평했습니다. 하지만 본명을 고르면서 아들이 좋은 건 다 누리기를 바라는 내 심사는 ‘세속 안의 자유’와는 영 거리가 멀었습니다. 처도 나와 똑같이 세속적인 욕심에서 내 제안에 반대를 했습니다. “아니, 우리 귀한 아들에게 하필 절두형을 당한 분 이름을 붙이다니요. 안돼요.”토마스 모어가 헨리 8세의 재혼을 반대하다 처형당한 걸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맞받았지요. “아, 현 김대중 대통령도, 내 옆방에 계시는 이돈명 변호사님도 토마스 모어인데 다 출세하고 칠, 팔십 장수하고 계시쟎아.” 결국 아들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로 낙착되었지만 처는 여전히 찜찜해 했습니다.
» 목이 잘린 토마스 모어를 세례명으로 쓴 김대중 전대통령과 부인 이희호 여사
그런데 현세의 두 토마스 모어는 부귀와 장수의 복을 다 누렸다지만, 형장에서도 내 수염은 죄가 없다며 수염을 젖히고 태연히 목에 칼을 받았다는 저 옛날 토마스 모어도 복 받은 사람일까요. 세속의 기준으로는 당연히 ‘아니오’입니다. 하지만 의로움 때문에 박해받는 이는 행복하다 하셨으니 분명 예수님께서는 그를 행복한 이라고 일컬으시겠지요.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라고도 하실 겁니다.
그러면 토마스 모어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박해를 받았지만 하늘나라 가서는 정말 잘 먹고 잘 사는 영복을 누리게 되는 걸까. 예수님 말씀을 보면 그 하늘나라마저도 우리 기대와는 영 다른 곳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로마와 기득권층의 압제에 신음하던 2천년 전 유다 땅을 두고도 하느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와 있다고 하셨고, 우리 마음 속에 있다고도 하셨고, 겨자 씨 같고 누룩 같다고도 하셨으니, 묵시록에 묘사된, 문자 그대로 각종 옥과 유리와 순금으로 이루어진 그런 천국은 아닙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초한 칼 라너 신부는 ‘믿음’이나 ‘착한 일’에 대한 보상으로 받을 복인 영원한 삶이나 부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삶)은 우리의 시공적, 생물학적으로 살아온 시간의“후에”의 시간을 계속한다는 것이 아니고, 영원이란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로 시간을 지양(止揚)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죽은 뒤 이 내 몸이 다시 살아나 시공간에서 계속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인격과 관심사의 존속이며 이는 누군가 한 사람의 인간과 역사의 존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영원한 삶을 희구합니다. 힌두교 성전 <바가바드 기타>에도 ‘즐거움과 괴로움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이는 영원한 삶을 얻기에 적합하나니’(2장 15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대통령까지 지낸 저명한 인도철학자 라다크리슈난은‘영원한 삶’이라는 대목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Eternal life is different from survival of death. It is the transcendence of life and death. (영원한 삶이란 죽음을 넘어서서 존속한다는 것과는 다르며,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현세와 내세에서 ‘나’의 행복을 누리려 종교를 열심히 믿고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의 스승들께서 가르치신 알짬은 자기중심성, 이기심을 버리고 해서 자비를 베풀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행복이요, 영원한 삶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의 자기주장과 욕심 없이는 한 치도 굴러가지 않습니다. 이런 세속 안에서도 저 ‘토마스 모어’들처럼 이기심을 자제하고 정의와, 자비,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은 복됩니다.
그리고 그들의‘인격과 관심사’는 영원히 존속할 것이요, 하늘나라가 그들 것입니다. <공동선 2019. 7, 8월호 머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