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쉼과깸'칼럼
» 영화 <나랏말싸미> 포스터에서 세종대왕역의 송강호와 신미대사역의 박해일이 마주한 모습
#세계적으로 한국이 가장 독특한 점은 다종교의 공존이다. 한국은 개신교와 불교, 가톨릭 3개 주류 종교가 정립해 있고, 원불교와 천도교 등 근세 민족종교와 전통적인 무교와 유교 등이 혼재하고 있다. 인도가 다종교국가의 대표처럼 불리긴하지만 힌두교의 비율이 80%가 넘어서 비슷한 세력으로 정립해있는 한국과는 다르다. 특히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까지 있으니, 한반도는 종교·이데올로기의 시장과 같다. 그러니 다른 것들끼리 만날 수 밖에 없다. 다른 것들끼리 만나면 싸우기도 하지만 배우기도 한다. 2300여년전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인도의 종교와 그리스철학이 만나 헬레니즘문명을 낳았듯이 만남은 새로운 것의 잉태와 창조로 이어진다. 한국의 대표철학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다산 정약용도 유학와 서학(가톨릭)의 만남을 통해 실학을 꽃피워냈다.
» 다산 정약용
» 알렉산더
#그런 역동적인 만남이 한국적인 독특한 영성을 낳았다. 북간도의 지도자로 문익환·문동환, 윤동주 등의 스승이었던 규암 김약연을 비롯해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 류영모, 함석헌이 깊은 동양철학에 대한 토대를 갖춘 가운데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여 서양 기독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문학적 기독교’를 선보였다. 가톨릭 교도로 유럽유학을 가서 원효로 박사학위를 받고 불교학자가 된 이기영 박사, 개신교인이면서도 고려의 대표적 승려인 보조 지눌 국사의 선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길희성 심도학사 원장, 역시 개신교에서 출발해 노자, 장자, 동학 등을 비교해 소개한 캐나다 리자이나대 명예교수 등이 다른 것의 만남을 갈등이 아니라 조화로 승화한 이들이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한때 신학대인 한신대를 다닌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도 그렇다. 동서양 종교·철학을 종횡무진하는 그는 최근엔 <스무살 반양심경에 미치다>를 통해 또한번 동서고금을 누볐다.
» 북간도의 독립운동지도자이자 목사이자 교육가이자 한학자였던 규암 김약연(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우리나라는 무속과 선도의 고조선, 불교의 통일신라와 고려, 유교의 조선 등 주류종교가 시대에 따라 급변하는 유일한 나라이기도하다. 따라서 종교간 헤게모니 다툼도 치열했지만, 때론 적과 아군을 나누기 어려웠다. 가령 한국불교의 대표승려인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은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유학자다. 고려때 국교였던 불교는 조선의 억불숭유정책으로 아웃사이드로 밀려났다. 조선을 주자학의 나라로 세웠던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써 불교의 폐단을 널리 알렸다. 그러나 왕권을 견제한 선비들과 달리 왕가는 불교와 끈을 놓지않았다. 태조 이성계부터 무학대사와 관계가 그랬고, 임진왜란과 같은 국난엔 서산대사와 사명당 등 승군들이 앞장섰다.
최근 영화 <나랏말싸미>가 역사왜곡논란에 휘말렸다. 신미대사를 한글창제의 주역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신미대사는 범어를 비롯한 언어의 천재로 한글 창제에 관여했다는 불교 내의 오랜 설 말고도 세종과 각별한 사이였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태종때 영의정을 지낸 김훈의 장남으로 출가승려가 됐고, 친동생 김수온이 집현전 학사다. 김수온의 문집에 세종대왕이 신미대사를 절에서 불러내 긴밀히 대화를 나눴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대왕은 유언으로 ‘우국이세’라는 칭호를 내렸다. 우국이세는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한자’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세종이 한글본으로 석가 찬가로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 <월인석보> 등이 모두 불서들이다. 세종의 형으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이 모두 극진히 존경했던 효녕대군은 신미·김수온 형제와 <불설수생경>을 함께 편찬한 각별한 사이다. 선비들 위주의 주자학의 나라였음에도 친민(親民)을 표방하며 ‘어린 백성’들에게 각별했던 세종이 주자학에 밀린 불교의 신미를 비롯한 승려들과 함께 백성 누구나가 읽을 수 있는 글자를 만든다는 창조적 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창작의 숨길마저 막으려는 건 오직 힘있는 것만을 숭상하는 또 다른 사대주의이자, 아웃사이더들을 끝내 내치고야 말겠다는 '무자비'가 아닐까. 이런 편가르기가 쉬운 글자를 만들어 남녀노소 선비 양민 상민 유자 불자 등 서로 다른 이들도 함께 공존케 하려던 세종의 뜻이 아님은 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