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비론은 중도와 정도가 아니다
아침 어느 조간신문에 실린 “한일 두 정상에게 바란다”라는 제목의 컬럼을 읽었다. 기고한 분은 필자를 비롯하여 국민의 많은 사람이 평소 존경하고 사랑하는 100세 원로교수 이시다. 한 세기 풍진세상을 살아온 원로 지식인 교수로서 한일 두 정상에게 충고보다 더한 질책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논조의 큰 흐름과 제시하는 원론적 소리에 필자도 공감한다. 그러나, 어딘지 씁쓸한 맘과 더 나아가 인간이란 결국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경험이 축적되어 형성된 ‘해석학적 이해의 동굴’을 벗어나기 힘든 것인가 절망스런 비감을 금할 수 없다.
글쓴 원로교수의 칼럼내용을 다시 요약하거나 인용할 생각도 없고 지면의 여유도 없다. 원로교수의 명필은 유명하고 부드럽지만 인류 사상사및 철학사에 해박한 그 분의 지식은 글 전체에 유감없이 깔려있다. 그런데 좀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동아시아 원로로서 한일 양국 두 정상에게 바라는 충고를 양비론(兩非論) 입장에서 충고하면서도, 비판의 초점과 무게는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훨씬 더 많이 두고 있다. 외국 정상에게 예우이거나 우리나라 신문이니 자국의 정부에게 더 가혹한 죽비를 내린다고 하는 동양의 겸양의 미덕이 발휘된 것일가? 그렇지도 않는 것 같다. 결국은 나라의 어른으로서 최고지식인 일지라도 그가 평소 견지하는 징치적 입장과 이념적 가치관이 묻어나온 것이다.
현정부 출범 2년동안 “안보, 외교, 경제등 성공적인 업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혹평한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약속한 “협치와 국민의 대통합”약속을 저버리고 이행하지 않는 책임이 정부에만 있는 것인양 질책한다. 오늘날 사태의 계기가 일본 식민통치기간 ‘징용보상문제’를 한국 대법원에 제기하고 그 결과를 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한 것도 현정부 책임이라고 간접적으로 책임을 돌린다. 한일간 “새 역사의 출발을 역행한 것이 일본의 아베 정권이다”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프랑스와 독일 양국간 민족적 갈등과 전쟁불화가 제2차대전 종결후 “독일지도자들의 반성과 과거에 대한 사과와 보상정신이 프랑스보다 더 훌륭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원로교수는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일본은 독일지도자들에 비해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국가지도자들의 도덕적 판단과 책임의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좀 더 본질적인 따끔한 질책은 하지 않는다.
원로교수의 글 내용을 조목 조목 비판하자는 의도가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의목적이 아니다. 더욱이 문재인 정권을 비호하거나 편들자는 그런 정치적 견해를 말하려는 것 아니다. 필자의 글 쓴 목적은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원죄성’이란 도덕적 불법을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경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인간성의 근본 문제점 곧 자기중심적 사고와 편견과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도덕적 오만같은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함께 생각하자는 것이다. 학술적 용어로 요약하면 “인간이란 해석학적 자기 동굴에 갇혀있는 실존적 존재”라는 것이다.
현실문제가 시시비비를 가리기 어렵게 얽혀 있을 때, 지식인들이 빠지는 유혹은 두편 다 옳다고 ‘양시론’을 펴거나 두편 다 틀렸다고 ‘양비론’을 펴면서 자기입장의 이념적 논조가 중도와 정도라고 주장하게 되는 비현실적 관념의 유희다. 가장 그럴듯하고 이상적인 태도 같아 보이지만 적어도 예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하라!”는 태도였다. 거기에 따르는 비판과 희생을 감내할 각오를 해야 한다.
원로교수의 자유와 인간애를 낙관하는 휴머니즘적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 강조소리를 들으면서 자꾸 19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 ‘전태일의 분신 사건’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어인 일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