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말, 바른 침묵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즐거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갈등을 품고 살아가야 하기에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함께 살다보면 서로의 성격과 생각과 태도의 차이가 때로는 버겁고 불편하게 느껴져서다. 이런 관계적 갈등은, 늘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작은 것에서 비롯된다. 특히 ‘말’ 때문에 갈등하며 상처를 주고 받을 때가 많다.
종교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상적 공동체로 여기는 초대교회조차도 교인들 사이에 말로 인한 갈등이 심했다. 그들은 세상의 욕망을 거슬러 개인적 소유마저 다 내어 놓고 “한 몸”처럼 살았던 공동체였는데도 서로 간에 비방과 모략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여러분이 서로 물어 뜯고 삼키고 하면 피차 멸망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라고 경고했을까!
이처럼 말 때문에 겪는 갈등과 상처가 깊다 보니 종교에는 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많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 성서의 야고보서는 “혀는 겉잡을 수 없는 악이요,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독으로 가득 찬 것”이라며 말의 파괴성을 경계한다. 불교도 입으로 짓는 네 가지 그릇된 행위로 거짓말, 이간질, 험담, 꾸밈말을 든다. 그만큼 말의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갈등과 상처가 주로 말 때문에 생긴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절망만이 아니라 희망도 갖게 한다. 자신과 남을 해치는 말을 하지 않으면 불필요한 고통을 줄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성서의 잠언은 “따뜻한 말은 생명나무와 같지만, 가시돋힌 말은 마음을 상하게 한다.”고 한다. 붓다는 구원에 이르는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 중 하나로 “바르게 말하기”(正語)를 가르쳤다. 차가운 말, 그른 말은 서로를 해치는 ‘칼’이지만 따뜻한 말, 바른 말은 서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바른 말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역설적으로 잘 들어야 한다. 대화는 말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듣는 행위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틱낫한은 “바르게 말하기”의 기초는 “깊은 경청”이라고 한다. 이를 ‘바른 침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자기 말만 하면서는 남의 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이 ‘어눌’한 것을 부덕이 아니라 오히려 어진 이의 덕목으로 여겼던 것도 그것이 신중한 경청의 방법이자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막말, 그른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바른 말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침묵인지도 모른다.
4세기에 살았던 사막의 교부 아가톤은 침묵을 배우기까지 삼 년 동안 입 안에 조약돌을 물고 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그 고행의 진정한 목적은 침묵을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말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아가톤은 ‘바르게 말하기’를 배울 때까지 침묵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런 수행 후에 아가톤은 깊은 사랑과 지혜의 말로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도했다.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가톤이 그런 사람이었다. 바른 침묵 끝에 바른 말이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