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월간 풍경소리>에 성공회 김경일 어거스틴 신부가 쓴 글입나다
아내가 마지막 부탁이라며 나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오면 피하기 어렵다. 이 정도 일로 가정을 깰 수도 없고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내는 온 가족이 참여하는 심리상담과 미술치료를 받기 원했다. 경비는 꽤 고가였으나 장애아를 둘째아들로 둔 탓으로 반은 국가가 부담하니 그런대로 부담은 많이 덜은 셈이니 눈 딱 감고 참여하라는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사제이다. 늘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상담을 해주기만 했지 내가 상담을 받고 치료대상이 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으므로 나는 계속 거절해 왔다. 그런데 아내가 나의 사제로서의 자존심이 부당하고 근거 없는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미술치료를 해야한다는 것이어서 항복했다.
아내는 우리 둘 간에 소통이 안 되는 부분을 미술치료 선생을 통해 논리적으로 남편의 고집을 꺾고자 했다. 나아가서 자신의 견해가 옳은 것임을 증명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고뇌 끝에 나는 미술치료에 임하게 되었다.
미술치료선생은 그 분야의 박사과정을 수료한 재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새롭게 만난 미술치료의 세계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상담은 미술치료를 매개로 해서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처음의 그 의욕적이고 무언가 회심에 찬 미소는 아내의 얼굴에서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어느덧 깨닫게 되었다. 미술치료 선생이 내편을 드는 통에 편파적으로 상담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담의 결론이 막판에 거의 다다르면서 얼추 예상대로 떨어졌다. 남편인 나와 두 아들이 아내의 강한 드라이브와 기에 짓눌려서 자신의 뜻을 잘 펴지 못하고 위축되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내의 참고 있던 화가 폭발해 뛰쳐나가 버리려는 것을 간신히 붙들어 끝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게 했다. 아내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아내는 상담선생님의 자질을 의심했고 실력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
결과와 상관없이 나는 미술치료과정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지금 나의 가족을 그려보라고 해서 간단히 유치원 수준의 그림을 그렸다. 그 다음에 원가족을 그려보라고 해서 다시 우리 부모님을 중심으로 외아들에 여동생 셋인 우리 가족을 그렸다. 놀라운 것은 내가 별 생각 없이 그린 그림인데 두 그림 다 우리 가족은 집안에 있는 것으로, 나만 집 바깥에서 울타리 너머로 집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그렸다는 사실이다.
상담선생이 그 점을 지적했다.
“왜 신부님은 가족과 같이 있지 않고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죠? 항상 가출상태인가요? 아니면 어릴 때부터 출가하신 건가요?”
“글쎄요… 왜 그렇게 그렸을까요? 집안에서 가족과 같이 있지 않으려 하고 바깥을 맴돈다는 뜻인가요?”
“여기 한 가운데 있는 이 얼굴은 누굴 그린 건가요? 이 얼굴만 눈 코 입이 없어요. 왜 안 그렸죠?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아, 네. 아버지를 그린 건데 왜 눈 코 입을 안 그렸을까? 나도 모르겠네.”
“혹시 아버지를 몹시 두려워 하셨나요?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아직 남아있다던가.”
“네? 그런데 왜 자꾸 눈물이 나지?”
나는 갑자기 온 가족이 다 보는 앞에서 꺽꺽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그리고 울음은 걷잡을 수없이 통곡으로 변했고. 상담선생님은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한참을 상담실에서 나가 기다려야했다.
나도 내가 이런 반응이 나오리라고는 예측하지 못 했다. 그런 그림을 무의식중에 그렸다는 것도 놀라웠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환갑이 다 된 나이에도 나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목숨마저 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는 아버지가 아버지의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는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와 내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그 누구도 감히 넘을 수 없는 월등한 체격과 힘을 지닌 상 남자였지만 나는 유난히 왜소하고 몸도 약한 졸장부였다. 아버지는 그런 나에게 권력의 상징인 판검사나 경찰간부가 되길 원했다. 나는 끝끝내 아버지의 뜻에 반항했고 나는 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자 내가 원하는 길로 가버렸다.
나는 아버지의 평생의 소원을 뭉개버린 몰인정하고 못난 제멋대로의 망나니 자식이었다. 세월이 지나 까맣게 잊어버린 줄 알았지만 그 순종에 대한 압박은 무의식을 뚫고 생각지도 않은 이런 순간에 느닷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을 다 바친 엄청난 헌신과 희생을 외면한 데 대한 죄책감은 여전히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나는 상담실을 나오며 다시 한번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버지. 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살 놈입니다. 저는 이게 편해요. 저 생긴 대로 살게요. 저 인제는 좀 놓아주세요. 저는 권력을 싫어합니다. 그냥 자유롭게 살다 가렵니다. 그게 제가 살 길이에요. 아버지. 죄송해요. 아버지가 절 그렇게 살도록 낳아주셨어요.”
이 글은 <월간 풍경소리>에 성공회 김경일 어거스틴 신부가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