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선지자인 송기득 교수가 3일 밤 8시14분 별세했다. 향년 88세.
송 교수는 대전 목원대 신학과 교수를 거쳐 2001년부터 계간지 <신학비평>과 <신학비평너머>를 내 교단신학의 한계 속에 잠들어있는 신학계를 깨웠다. 정년퇴직 후 전남 순천에 정착한 그는 죽음을 예감하고 지난해말 계간지를 폐간하고, 제자들과 함께 장례식을 대신한 ‘인생송별회’를 4차례에 걸쳐 가진 뒤 장례부고는 내지말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유산 3천만원도 신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으로 내놓았다.
연세대 철학과 재학시절 폐결핵에 걸려 광주 동광원에서 영성가 류영모로부터 배운 송 교수는 30대 때 당시 자신을 치료했던 여의사 여성숙 선생이 폐결핵환자 치료를 위해 목포에 설립한 한산촌에 투신해 10여년간 아무 것도 없던 산등성이에 건물들을 지어 폐결핵환자들과 살며, 인문학공부모임을 이끌며 헌신했다.
전남 고흥의 어촌에서 태어나 배를 곯으며 독학을 했던 고인은 연세대 철학과에서 수석을 놓치지않은 재원으로 학부졸업생으로는 유일하게 모교 철학과 전임강사로 임명되기도했지만 5·16구테타로 징집돼 전임강사직을 잃으면서부터 파란고해의 삶을 살았다.
특히 아내 정순애씨에 대한 그의 글은 ‘세기의 순애보’라고 할만했다. 정순애씨는 여순사건으로 졸지에 남편을 잃고 전도사로 살며 아이 셋을 키우고 있었다. 송교수는 대학생 때 13살 연상인 그를 만나 63년을 해로했다. 그는 아내가 2016년 96살로 별세하자 매일 아내에게 보내는 900여통의 편지를 써 10권의 책을 냈다. 그는 부인과 수양자식들에게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서 알뜰살뜰 챙겨주는 인간미가 넘쳤다.
고인은 53살에야 목원대에 안착할 때까지 10여년을 보따리 강사로 지내거나 늦깎이 교수로 대학에 들어와서도 안주하지않고 민중신학과 여성신학, 한국신학을 개설해 토착신학의 길을 선구적으로 개척했다.
그는 생전에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미신이 그저 성서와 찬송가를 끼고 교회만 가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십일조만 바치면 복 받는다는 수준의 ‘한국 기독교’를 만들었다”며 “지금 ‘정통’이라는 이름의 기독교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역사적 예수’가 아니다”고 선언했다.
그는 또 기독교의 핵심 진리인 ‘대속자 그리스도’는 예수 이전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주장했다. 즉 ‘자신이 저지른 죄를 예수가 대신 받아 자신의 죄를 사함 받는다는 대속론은 양이나 소, 순결한 처녀 같은 가엾은 희생제물을 바친 유대교의 제사 전통에서 유래했다’고 했다.
인간신학의 주창자인 그는 “예수는 ‘사람은 안식일(모든 것)의 주인’이라며 주인됨과 주체성을 천명했는데 대속론은 인간을 비주체적인 노예로 전락시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은 로마의 지배세력과 헤로데의 독재권력,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체제의 집권자들이 일삼은 탄압과 착취로부터 이스라엘 민중이 해방되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 회복 운동이었고, 실제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역사 안에 실현하기 위해서 온 삶을 다해 살다 처형당했다”며 “해방과 자유, 평등과 평화, 정의와 구원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인간화가 실현된 세계가 예수의 하느님나라다”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선미리, 선애리, 선중남, 송석(공무원)이 있다. 장례식장은 전남 순천메디팜병원이며 발인예배는 5일 오전9시30분이며, 장지는 전남 고흥군 포두면 선영이다. (061)741-4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