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최로 지난 21~29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체코 동유럽 3개국 가톨릭 문화유산 순례’에 동행했다. 첫 순례지는 폴란드 크라쿠프. 폴란드 1천년의 영광이 살아 숨 쉬는 고도로 동유럽의 로마로 불리는 곳이다. 우리나라의 세종대왕 이상으로 폴란드인이 성당마다 조각상과 초상화를 배치해 추앙하는 폴란드 출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근 바도비체에서 태어나 신학교와 유럽의 명문 야기엘론스키대를 다닌 곳도 이 도시다. 크라쿠프의 국제공항 이름이 ‘성요한바오로2세공항’인 데서 그에 대한 자부심이 읽힌다. 2차대전에도 공습을 피해 용케 파괴되지 않은 크라쿠프지만, 겉모습과 다른 아픔이 스며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총통은 야기엘론스키대 교수들을 처형하고, 유대인이 많이 살던 크라쿠프에서만 5만5천명의 유대인들을 색출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집단수용소로 보냈다. 바오로 2세의 유대인 친구가 수용소로 끌려간 것도 그때였다.
그 유대인들이 끌려간 61㎞를 달리자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의 오시비엥침(독일 이름 아우슈비츠)이란 자그만 도시가 나온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들어서자 이미 수천명의 관람객으로 붐볐다. 검색대를 통과하면 70여년 전 130여만명이 학살된 현장이다. 그런데 그 지옥이 너무도 평이해서 놀랍다. 3열 횡대로 늘어선 붉은 벽돌의 2층 건물 28개 동은 마치 폐교 같았다. 건물들 외곽으로 수감자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쳐놓은 전기철책이 아니라면 말이다.
애초 이 건물들은 폴란드가 쓴 군용막사였던 것을 1940년 6월 나치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러가 인종청소를 위한 절멸수용소로 사용했다. 전시관으로 꾸민 수용소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침상들이 있고, 유대인들이 들고 온 가방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도착하면 나치 군의관들이 일단 노동 가능자와 불가능자로 분류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노동불가 집단으로 구분된 어린이, 노인, 임산부, 병자, 장애자 등은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살해됐다. 전시실 한쪽엔 ‘샤워장으로 들어가라’는 말에 속아 유대인들이 벗은 신발 10만켤레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중엔 두세살배기 아이들이 신었을 신발이 적지 않았다. 이곳에서 살해된 130만명 가운데 아이들이 23만명이었다는 박물관 안내자의 설명을 듣자 순례객들의 눈이 벽면 사진에 꽂혔다. 크게 확대된 사진엔 수용소에 막 도착해서 영문을 모른 채 엄마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곧바로 가스실로 보내졌을 아이들이었다.
수감자들이 남긴 수만개의 안경들, 그리고 나치가 가발을 만들기 위해 잘라 쌓아놓은 3톤의 수감자 머리카락들이 여전히 고통으로 일그러져 울부짖고 있었다. 아우슈비츠가 이처럼 생생하게 보존된 것은 나치가 다른 절멸수용소들을 미리 폐쇄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불태우거나 파괴한 반면 이곳은 그런 인멸 전에 소련군이 당도한 때문이었다. 탈의한 유대인들을 몰아넣어 유일한 천장 구멍에 독극물인 ‘치클론 B’ 가루를 넣어 짧게는 3분, 길게는 30분 만에 전원을 절멸시켰던 가스실과 주검들을 태운 소각장과 총살대, 교수대 등만이 지옥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죽음은 해방이었을지 모른다. 톱밥을 섞어 구운 돌덩이 같은 빵 한개와 상한 야채로 끓인 국 한 국자로 모진 노동과 고문을 견디며 가족과 동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던 삶이 더 큰 지옥이었을 것이다.
이곳엔 다수의 유대인 외에도 쓰레기로 치부한 집시, 장애인, 혼혈, 동성애자,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나치에 저항한 독일인, 유대인을 도운 폴란드인 등도 있었다. 인간을 소각될 쓰레기로 치부한 나치들과 달리 죽음조차도 해칠 수 없는 존엄을 보여준 이들도 있었다.
11번 동은 폴란드인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1894~1941)가 있던 곳이다. 20대 때 동료 수사들과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의 기사회’를 창설하고, 1930년 일본 선교를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부산에 들르기도 했던 콜베 신부는 유대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끌려와 수용소 금지 조처에도 고해성사와 상담으로 수감자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그러다 1941년 7월 한 수감자가 탈출했다. 당시 수용소에서는 한 사람이 탈출하면 다른 죄수 10명을 아사감방으로 보내 굶겨 죽였다. 수용소장이 죄수들을 불러 세워 10명을 골라내자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이가 ‘저는 아내와 자식이 있어요. 죽기 싫어요!’라고 외쳤다. 그때 콜베가 죽음을 자처했다. 서너명을 넣었다는 아사감방은 한명이 서 있기에도 숨이 막힐 듯한 좁은 공간이었다. 콜베는 수감자들과 묵주기도와 성모찬가를 바치며 죽어갔다. 이에 감동을 받은 한 수용소 간부가 콜베의 모습을 기록해두었다. 2주 뒤 나치는 아사감방 수감자가 새로 생기자 콜베와 생존자 4명에게 독극물을 주사해 살해했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순례를 이끈 주교회의 홍보국장 안봉환 신부는 “핍박받는 약자를 대신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콜베 신부의 살신성인은 종교인들의 영원한 귀감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나치 시대엔 다수의 교회도 나치의 만행을 방조한 죄에서 자유롭지 않다. 요한 바오로 2세는 2000년 ‘회상과 화해·교회의 과거 범죄’라는 문건을 발표해 그리스도교가 인류에게 범한 주요 범죄로 유대인 탄압과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침묵’을 공식 사과했다. 1982년 ‘수감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시성된 콜베 신부처럼 어둠 속에서 교회의 양심을 잊지 않은 이들은 또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의 대표적 성당인 성슈테판대성당의 주교관 건물 벽엔 작은 표지석이 있었다. 나치 시대 핍박받던 유대인 수천명에게 피난처를 제공한 일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빈대교구 프란츠 샤를 보좌주교는 나치 시대 교회의 침묵과 관련해 “나치에 가장 강력히 저항한 공산주의자 다음으로 가톨릭도 젊은 사제들을 중심으로 저항했다”며 “프란치스코수녀회 소속 간호사였던 마리아 레스티투타 플라츠 카프카 수녀는 독일군 간호를 거부하고 나치를 비난하는 문서를 만들어 배포하다 체포돼 1943년 빈형무소 단두대에서 처형됐다”고 말했다. 건물 한편엔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이 수녀를 기리는 작은 성당이 있었다. 지옥을 만든 것은 인간이었지만, 지옥에 천상의 빛을 비춘 이들 또한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