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움과 순수함은 누구도 독점할 수도, 독점해서도 안되는 것
» 오스트리아 멜크수도원의 천정벽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도나우강을 따라 차로 한시간가량 달리면 도나우강과 멜크강 합류 지점 언덕 위에 멜크 수도원이 서 있다. 1089년 이 지역을 수도로 한 바벤베르크의 왕 레오폴드 2세가 자신의 성을 베네딕토회 수도승에게 기증하면서 수도원이 된 이 장소는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바하우 문화경관의 핵심이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명작 <장미의 이름>에 영감을 준 장소로도 알려져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다.
18세기 자타공인 유럽 최대의 왕조인 합스부르크가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주 찾은 곳답게 18세기 초 개축된 유럽 최대의 바로크식 건물도 아름답지만, 10만권의 장서가 보관된 도서관이야말로 움베르토 에코의 상상력을 자극할 만하다.
» 멜크수도원이 있는 바하우 문화경관구역
#1987년 명감독 장자크 아노의 연출과 숀 코너리 주연 영화로도 개봉된 <장미의 이름>에 따르면 1327년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수도원에서 연쇄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따라 멜크 수도원의 젊은 수련사 아드소가 스승인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윌리엄과 함께 사건 해결에 나서며 ‘신의 수호자’를 자처한 노수사 호르헤가 중세의 금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는 것을 막기 위해 책에 독극물을 묻혀놓은 사실을 밝혀낸다. 순례단을 안내한 문화관광 담당 마르틴 로테네더 신부는 “이곳 도서관에도 중세에 금서들이 있었느냐”는 물음에 웃으면서 “있었다면 흥미진진했을 것”이라며 “허구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는 “움베르토 에코가 여러차례 찾아와 만나긴 했다”고 말했다.
» 멜크수도원을 배경으로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을 쓴 움베르토 에코
» 멜크수도원의 로테네더 신부
#로테네더 신부의 말대로 <장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2권 희극편이 있다는, 허구의 설정이다. 시학 1편인 비극만을 읽고 경건함을 유지해야 할 수도사들이 희극을 읽고 웃으며 경박해지는 것을 막으려 금서를 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법한 진실’을 담지 않았다면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다. 신플라톤학파의 철학을 종합한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플라톤 철학을 기독교화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기독교화한 인물이다.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것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킨다. 플라톤은 ‘절대적인 질서가 존재하는 이데아’와 ‘변화무쌍한 일상’을 구분한 이원론을 펼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이면서도 이상적인 세계를 현실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다는 일원론을 펼쳐 자연학과 인간학을 발전하게 하고 진화론을 격발시켰다. 그리스도교는 이원론과 일원론, 신 중심과 인간 중심의 줄다리기를 하면서 서로를 박해하기도 하고, 이단시한 것들을 수용해 변화해온 역사였다.
» 멜크수도원 복도
» 멜크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학교, 김나지움의 학생들이 파티를 하는 모습
#오스트리아의 수도원들은 다른 나라의 수도원들과 달리 와인과 음료수, 초콜릿을 내놓으며 환대했다. 합스부르크왕가의 부유함과 사교성이 낳은 환대의 문화가 엿보였다. 도서관의 책도 신청하면 다 빌려주고, 가급적 많은 방을 들어가 볼 수 있도록 하고, 외부인이 참석하는 피정 프로그램도 상시 운영한다. 로테네더 신부는 “하느님의 현현인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모든 사람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중세 성서를 비롯한 도서관의 귀중서들을 폐쇄해 신에게 가는 길과 성스러움과 순수함을 독점하고, 털끝만큼이라도 위험 요소가 되면 마녀사냥으로 고문과 살인을 자행했던 중세 교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개방성이다.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순수함을 해치는 것들은 제거해야 한다던 히틀러가 탄생한 린츠가 이 지방과 가깝다. 문제는 순수함의 여부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나만이 진리’라는, ‘나만이 순수하다’는 중세식 독선으로 드러나기 마련인 권력욕과 탐욕이 아닐까. 성스러움과 순수함을 독점하며 다른 것을 무조건 매도하며 증오심을 부추기는 자들이야말로 이미 성스러움과 순수함에서 멀어진 것이다. 자신의 허물을 돌아볼 줄 알며, 누구나 성스럽고 순수해질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여는 자들이야말로 이미 성스럽고 순수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