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골성당 입구
14~15세기엔 수도 프라하와 어깨를 견주었던 보헤미아 왕국의 중심지 쿠트나호라라는 조그만 체코의 중세 도시엔 화려함의 극치인 중세 성당들과는 너무도 대비되는 성당이 있다. 세들레츠해골성당이다. 이 성당은 1142년에 세워진 보헤미아 최초의 시토회 수도원의 일부다. 수도원 건물은 1812년 이후엔 담배공장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필립모리스가 인수해 담배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해골성당 밖 무덤들
담배박물관을 지나 성당에 들어서니 정원에 무덤들이 있다. 유럽엔 도심에 묘지공원이 적지 않다. 이 무덤들도 그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정원에서 반지하쯤에 해당하는 납골당 입구부터 해골 장식들이 즐비하다. 장식이 아닌 진짜 해골들이다. 네곳에서 각각 1만구 이상의 해골을 쌓아뒀고, 성당 가운데를 해골들로 샹들리에처럼 꾸몄다. 이곳엔 적게는 4만구, 많게는 7만구의 해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해골성당 납골당 내부. 해골들로 샹들리에를 규며놓았다.
전설에 따르면 1278년쯤 체코에 거주하던 한 아빠스(수도원장)가 왕의 명령으로 예루살렘에 파견됐다가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골고다 언덕에서 흙 한줌을 가져와 세들레츠 묘지에 뿌렸다. 또 예루살렘 성지에서 가져온 흙을 축성과 치유에 사용했다. 그러자 유럽인들이 너도나도 성지화된 이 세들레츠에 묻히기를 원했다. 이 일대엔 14세기 흑사병이 창궐해 3만명의 주검이 매장됐고, 비슷한 시기 후스전쟁으로 1만여명의 사망자가 더해졌다. 15세기 말 유골들이 성당 납골당으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16세기에 마치 장식을 하듯이 해골을 배열했다고 한다. 현재의 성당과 납골당은 바로크 시대인 18세기 건축가 얀 블라제이 산티니에 의해 재건됐다.
» 납동당 내부에 1만구씩의 해골무더기가 네군데 있다.
14세기 흑사병으로 당시 유럽 인구 7500만~2억명 가운데 30∼50%, 지역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몰살을 당했다. 페스트균은 전염이 너무도 빨라서 한명이 죽으면 주검을 매장하러 온 친구 2명과 장례미사를 집전하러 온 신부까지 넷이 주검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흑사병 초기엔 전염병에 무지몽매했던 성직자들이 교회에 모여 죄를 고백하면 병이 낫는다고 해 좁은 공간에 군중이 모여 전염이 가속화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했다고 전한다. 더구나 중세엔 신의 대리자로 자처했던 성직자들마저 흑사병 앞에서 예외 없이 쓰러지자 정신적 공황이 가속화됐다.
속절없이 죽어갔을 이들은 모든 것을 벗고 해골만 남았다. 노소도, 직위도, 성속도, 빈부도…. 그래서 평등했다. 누구나 예외 없이 평등하게 죽는 것처럼. 그래서 그 모든 해골이 한목소리를 들려주는 듯했다. 직위든 지식이든 재산이든 미모든 지상에서 쌓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죽음 너머까지 가져갈 수 없다고. 성당 안내서엔 이를 말해주듯 라틴어 명언이 새겨져 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 체코 프라하구도심 광장의 시청시계탑에서 벌어지는 죽음의 쇼를 보는 사람들
프라하의 옛 도심 광장은 죽음을 생각하기엔 너무도 화려했고, 인파로 붐볐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죽음의 쇼’가 펼쳐진다. 여전히 작동되는 천문시계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옛 시청 시계에는 한시간마다 정시가 되면 모래시계 주위로 12개의 인형이 도는 짧은 공연이 펼쳐진다. 해골은 죽음을, 모래시계는 ‘유한한 인생’을 말해준다. 튀어나와 종의 줄을 당기는 것은 두려움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매 순간 유한함을 초월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부활을 돕는 길을 이렇게 알려주는 듯하다.
‘미움 없이 용서하라. 후회 없이 나누어라. 아낌없이 사랑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