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검정 앞을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걷다
» 서울 세검정 옥천암 마애불
이제 서울 종로구 세검정(洗劍亭)앞에서 옛 무인들처럼 칼 씻을 일은 없을 것이다. 또 한지가 귀하던 시절 이미 사용한 닥종이를 다시 사용하기 위해 먹물로 쓰여진 글씨를 이 골짜기로 흐르는 맑은 물에 씻었다고 한다. 이제 종이도 물만큼 흔한 시절이라 재생지를 사용할 일도 없어졌다. 볼거리가 흔하지 않던 시절 한양 도성사람들은 큰비가 온 뒤에는 물구경을 왔고 온 김에 (못볼 것을 봤고, 못들을 것을 들었던?)눈과 귀까지 씻은 후 집으로 돌아갔다고도 한다. 이제 너래반석 위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이 걸으면서 마음을 씻는 곳으로 바뀌었다.
물길이 화강암 바닥 위를 흐르더니 이내 모래톱을 만든다. 물 속에는 손가락만한 물고기들이 여유롭게 노닌다. 그런데 전혀 야생이라고 할 수 없는 큰 비단잉어까지 보인다. 집안의 대형어항에서 기르다가 어느 날 그것이 부담스러웠던지 누군가 방생한 모양이다. 그럼에도 자기집 마냥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게다가 용이 되기 위해 용문폭포를 향해 상류로 올라가려는 잉어를 위해 어도(魚道)까지 만들어 두었다.
군데군데 청둥오리도 몇 마리 보이고 흰 두루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은 1미터 남짓한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날개짓으로 몸을 옮긴다. 옆 의 재두루미는 이미 부리로 물고기를 나꿔채 꿀꺽꿀꺽 삼키고 있다. 교각을 끼고서 야생풀들이 수초처럼 자라 군데군데 작은 섬을 만들면서 생태계까지 갖추었다. 시멘트 제방 벽에 언뜻언뜻 보이는 이끼군락들은 아직도 이 골짜기가 일급청정지역이라고 애써 강변한다.
계속 계곡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청계천 도보길처럼 적극적인 토목기술을 자연에 개입시킨 도회풍의 세련됨은 아니지만 원래모습을 그대로 두면서 꼭 필요한 것만 가미한 자연스러움이 나름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기존 다리 밑으로 다시 산책로를 만들다보니 성인 한 명이 제대로 지나갈 수 없는 높이의 구역도 있다. 구조상 옛다리를 높이거나 새로 만든 길을 낮춘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머리위 충돌주의’란 안내문 외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그렇다면 고개를 숙이거나 허리를 굽혀 지나가면 될 일이다. 그런 자세가 내키지 않는다면 우회계단을 통해 다리 위 건널목을 통과하면 된다. 어쨋거나 시멘트길과 흙길 그리고 나무데크로 된 길이 골고루 섞여 있다. 그 덕분에 자칫하면 단조로움으로 인하여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덜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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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년 전(1998~1999년 무렵)에 완공했다는 내부순환고가도로의 기둥이 주는 육중한 우람함이 개발시대의 상징처럼 하천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산도 가리고 하늘도 가린다. 하지만 그 위로 차들이 물처럼 흐르고 있다. 도로를 물길로 간주하는 풍수설을 빌린다면 하천이 은하수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그 옛날 배로 물류가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차가 대신하고 있다고나 할까. 그 밑으로 마을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천변 위에 둥근 기둥을 쌍으로 7줄을 세워 시멘트 마당을 만들었다. 물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필요한 주차공간도 확보하는 절묘한 타협책이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방식을 찾았다고나 할까.
멀리 기와집을 머리에 이고서 큰바위에 새겨진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상이 보인다. 고려말에 조성한 이래 칠백여년동안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있는 마애불이다. 특히 불암(佛巖) 인근에는 옥처럼 푸른 빛이 나는 맑은 샘이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옥천(玉泉)’으로 불리었다. 약수가 산허리에 있는 바위굴에서 흘러나왔는데 풍병과 체증을 제거하는 효험이 있다고 하여 장안의 남녀들이 줄을 서서 다투어 물을 마셨다고 『임원경제지』는 기록했다.
5리 남짓한 계곡길 따라 시대마다 역사가 있고 곳곳에는 삶의 이야기가 함께 한다. 구한말 이 계곡을 찾았던 서광전(徐光前)선생은 한글가사체로 주변풍광을 이렇게 읊조렸다.
계곡에는 암벽이 펼쳐져 수석이 아름답고
소나무 그늘이 땅을 덮어 바람과 기운이 시원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