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림출판 서우담 대표가 화엄경 한자 59만4천자에 우리말 덧말을 붙여 5권의 책을 내고, 스승 탄허스님의 사진으로 바탕화면을 깐 모니터 앞에서 출간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옛날 딸만 둔 노인이 뒤늦게 아들을 낳았는데, 사위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칠십생남자(七十生男子·칠십에 아들을 낳은들) 비오자(非吾子·내 자식이 아니라). 가중지물(家中之物·집안의 재산을) 진급녀서(盡給女壻·모두 사위에게 줄지니) 외인물론(外人勿論·외인을 말말라)’. 그런데 아들이 성인이 되어서 그 유서를 보고, “아버지가 그랬을리 없다”며 관청에 탄원을 했다. 원님은 사위가 아전인수격으로 단 ‘토’(吐)와 다른 토를 달아 해석했다. ‘칠십생남자(七十生男子·칠십에 아들을 낳았으니), 비오자(非吾子·어찌 내 자식이 아니랴). 가중지물진금(家中之物盡給·집안의 재산을 모두 줄지라도) (女壻外人勿論·녀서외인물론·사위는 외인이니 말하지 말라)’. 사위가 재산을 독차지하려 자식을 죽일까 두려워하며 쓴 유서이므로, 달리 토를 달아 자식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 조실을 지낸 탄허 스님(1913~83)은 1세기 <화엄경>을 집대성한 이통현 장자의 호를 따 월정사 조실채를 방산굴이라고 짓고, 매일 밤12시에 일어나 10년에 걸쳐 <화엄경> 80권과 <통현론> 40권, <청량국사 화엄소처>, <현담> 등 화엄 관련 경·론·소를 집대성해 직역한 <신화엄경합론23권>을 내놓았다. <화엄경>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탄허 작업의 백미는 현토(懸吐)다. ‘七十生男子’란 같은 한문을 두고도, ’낳은들’이냐 ‘낳았으니’냐, 어느 토를 다느냐에 따라 해석이 반대가 되듯이, 부처의 뜻이 잘못 전해지는 일이 없게 토를 바로 붙인 것이라는게 <도서출판 교림> 서우담 대표(80)의 말이다.
#서 대표는 월정사로 출가해 6년간 탄허를 시봉하다가 환속해 탄허가 출가 전에 남긴 속가 딸과 결혼했으며, 50여년을 한결같이 탄허의 책을 번역·출간해왔다. 탄허가 서울 인사동에 설립했던 화엄학연구소를 이끌어온 서 대표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탄허의 <신화엄경합론>에 덧말(우리말)을 붙여 5권 3200쪽으로 출간했다. 무려 3년간 59만4천여자의 한자의 한글음을 붙여 한글세대도 <화엄경>을 독송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미 <화엄경> 한글본들이 많이 나와있는데, 한글음 화엄경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에대해 서 대표는 한번 한글음을 잘못 붙이면 영구히 후학의 눈을 멀게 할 수 있기에 제대로 된 음을 붙인 것이라고 했다. ‘복개(覆蓋)공사’는 ‘뒤엎을복’이 아닌 ‘덮을 부’이므로 ‘부개공사’라고 해야하는데, ‘복개공사’로 굳어지고, 장마가 ‘지리(支離)하다’도 누군가 잘못 쓰면서 ‘지루’로 굳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후학들의 눈이 멀어 <금강경>의 핵심인 항복기심(降伏其心·마음을 항복받음)을 승려들조차 ‘강복기심’으로 읽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번 출간은 이런 중요성을 안 한 비구니 스님이 1억원을 희사헤 이뤄졌다고 한다.
#<대방광불화엄경>(화엄경)은 불경의 정수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뒤 첫번째 설한 경이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알아듣지못하자 하나하나 설한게 8만4천경전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 도쿄대는 화엄학연구소를 설립해 화엄경합론 번역 작업을 시도했으나 여의치않자 1970년대 탄허를 초청해 일주일 강연을 들었다고 한다. 그 때 스승을 모시고갔던 서대표는 “100명의 불교학자들이 스님의 일주일 강연이 다 끝나자 즉각 책상을 다 치우고 큰절로 3배를 올렸다”며 “스님처럼 유·불·선에 모두 통한이가 없어 백명으로도 번역하지못하다 백명의 지혜를 다 합쳐도 당하지못할 견처를 보고 감복한 것이지, 그들이 총칼을 들이댄다고 한국인에게 큰절 삼배를 올리겠느냐”고 말했다. 탄허의 제자인 전 조계종교육원장 무비스님도 <대방광불화엄경 강설(담앤북스 펴냄) 81권을 지난해 마무리했다. 너무도 어려워 대중들이 다가서기 두려워했던 <화엄경>의 대중화가 가까워진듯하다.
#의상은 661년에 당나라의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서 종남산 지상사에서 화엄종의 2대 조사 지엄스님으로부터 화엄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그 핵심사상을 210자(字)로 담은 법성게를 남겼다. 근세엔 선의 중흥조인 경허스님이 월정사에서 화엄경을 설했다. 이 때 경허는 두두물물이 화엄 아닌 것이 없다고 했다. 모두가 귀하고 아름답지않은 것이 없으며 있는 그대로가 청정법신 비로자라불이라는 것이다. 경허로부터 법을 물려받은 조계종의 초대종정 한암스님(1876~1951)은 월정사에서 동산·효봉·고암·관응·탄허 스님에게 화엄경을 가르쳤는데, 훗날 한국불교의 주춧돌이 된 이들 5명에게 한명당 열장씩 읽게 한뒤 한암이 해설을 했다고 한다. 한암은 자신이 현토(縣吐)를 붙인 <화엄경>을 제자 탄허스님(1913~83)이 번역케 해 선방에서 결제를 난 수좌들에게 해제 때면 걸망에 넣어 내보냈다고 한다. 또 불상 앞엔 늘 <화엄경>을 모셨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