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니터 사경 중인 법인 스님
얼마 전부터 독서 방식을 바꾸었습니다. 지금은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을 주로 보고 있습니다. 큰 맘 먹고 전자책 전용 리더기를 하나 샀습니다. 여러모로 참 편리하고 좋습니다. 먼저 글자를 읽는 눈이 편합니다. 나빠진 시력 때문에 늘 힘들었는데, 리더기는 마음대로 글자를 키울 수 있기 때문에 눈이 피곤하지 않습니다. 또 휴대하기 편하니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틈틈이 책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덕분에 자투리 시간에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만지는 일이 크게 줄었습니다. 전자책을 대여해 주는 곳에서 월 6천5백원으로 원하는 대로 책을 보니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줄어들었습니다.
제가 종이 대신 모니터를 통해 책을 본 직접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대흥사에서 이곳 실상사로 이사 올 때 무엇보다도 책이 가장 큰 짐이었습니다. 실상사의 방이 무척 좁으니 애초부터 모든 책을 옮기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묵은 책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나눠주고, 버리고, 지인의 처소에 맡기고, 최소한의 분량만 제 방으로 가져왔습니다. 일주일 동안 그 일을 하고 나니 몸에 진이 빠졌습니다. 그때 결심했습니다. 종이책을 최소화하고 전자책으로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해인사 장경각에 소장된, 이른바 팔만대장경이라 불리는 고려대장경도 이제는 전자대장경으로 변신했으니, 저의 책장과 독서도 그리 반역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리더기로 책을 보면서 전자책을 예찬하니 이웃의 지인들이 한마디씩 말을 던집니다. “그래도 나는 종이책이 좋아요. 책을 읽는 느낌이 들거든요,” 헐! 아니 그럼 나는 느낌 없이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일체유심조 아닌가요? 마음 먹기에 달린 거지. 뭐 그리 종이와 모니터를 분별하시나요.” 그렇게 일합을 주고 받았습니다. 하여 차이가 있다고 해서 차별하면 안된다고 했으니, 각자의 독서 가풍을 존중해 주기로 합의했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마음을 울리는 문장에 밑줄을 긋습니다. 전자책도 그런 기능이 있습니다. 글을 읽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영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독서는 읽어가는 그 자체로 기쁨입니다. 마음에 ‘텅빈 충만’과 ‘가득한 충만’을 동시에 느낍니다. 진공(眞空)과 묘유(妙有)가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은, 책을 읽고 나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합니다. 책을 통해서 우리는 알아가고 배워갑니다. 앎과 배움은 정보와 지식을 쌓는 일만은 아닙니다. 앎과 배움이란 책 속의 말을 통해서 생각이 달라지고, 깊어지고, 넓어지고, 새삼스러워지는 변화를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단 하나의 문장이 망치가 되어 우리의 굳어지고 닫힌 우리의 생각을 울리고 깨뜨린다면, 굳이 많은 문장을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양은 아닐지라도 ‘기억’은 매우 소중합니다. 불교 수행 덕목인 팔정도(八正道)에 정념(正念)수행이 있습니다. 바르게 기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때 기억은 그저 어떤 사건과 지식을 보관만 하는 기능을 말하지 않습니다. 잘 간직하고, 새기고, 살펴야 하는 그런 재생적, 통찰적 기억을 말합니다. 바르게 저장된 기억은 그 자체로 인격이 되고 삶의 방향이 되고 사물과 사건을 판단하는 힘이 됩니다. 그러니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들은 늘 스승의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새기는 수행을 했습니다. 오늘날 책을 읽는 일은 바로 스승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책속의 말들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느끼는 희열과 함께 내용을 잘 기억하기 위하여 밑줄을 칠 것입니다. 배움을 좋아하는 분들은 밑줄을 친 문장을 때때로 다시 읽거나 노트에 옮겨적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트에 손글씨로 옮겨 적지 않고 노트북 컴퓨터에 <사경 노트>라는 폴더를 만들어 보관합니다. 그 폴더가 제8 아뢰야식 ‘기억 저장소’인 셈입니다.
사경(寫經)이란 경전의 말씀을 옮겨 적는 수행이자 신앙입니다. <금강경.>을 비롯한 경전에서는 경전의 말미에 수지(受持)· 독송(讀誦)· 서사(書寫)· 해설(解說)하라고 당부합니다. 경전을 지니고, 읽고, 쓰고, 이웃에게 설명해 주라는 뜻입니다. 위의 서사가 곧 사경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고래로 전래 되어 온 사경 유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먹과 금물과 은물로 쓴 사경들이 병풍이나 첩의 모양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사경은 개인들에게는 말씀을 기억하는 수행이고 이웃과 후대에 법을 전하는 공덕이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경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쓰는 그 순간순간의 그 시간들 또한 비움과 채움으로 충만한 시간입니다. 이렇게 사경의 공덕은 언젠가 누구에게 받는 결과가 아니라 그 순간순간에 누리는 희열입니다. 법열(法悅)의 향연입니다.
» 전자책으로 플라톤아카데미가 출간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고 있다.
종이책과 전자책이 함께 하듯이 나의 사경은 연필이나 붓이 아닌 키보드의 자판으로 새기는 이른바 ‘모니터 사경’입니다. 이런 모니터 사경에 이웃들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우아 대박! 멋져요, 짱이예요,” 젊은 세대들의 응원입니다. “에이~ 스님이 너무 앞서 가신다. 그래도 수행은 전통적으로 하셔야 하지 않나요. 편리한 기능으로 하시면 안되잖아요.” 비교적 연세 지긋하신 분들은 핀잔을 합니다.
‘모니터 사경’에 대한 반응을 대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도구와 마음의 상관 관계’를. 대부분 종이에 붓이나 펜으로 글을 쓰면 마음이 경건해진다고 말합니다. 저도 그렇게 메모 수준의 사경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트북 화면에 글을 옮겨 적는 사경도 마음가짐과 방법에 따라 종이 사경에 못지않게 얼마든지 마음의 평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모니터 사경’은 처음에는 실용적인 목적에서 시작했습니다. 생각을 바꾸게 하는 문장, 가슴을 울린 문장을 기억하기 위하여 기록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강의나 글쓰기에 참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종이보다 노트북에 기록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보관과 활용을 위해 그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이왕이면 종이에 사경하듯 하면 아니 될 일도 없겠다 싶었습니다. ‘집중과 사유’를 체험할 수만 있다면 도구가 장애될 게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마치 그 오래 전에 원고지와 펜에서 모니터와 자판으로 자연스레 이동했던 경험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저는 노트북의 모니터를 보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모니터 사경은 다음과 같이 합니다. 먼저 노트북을 펼쳐놓고 합장합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3분 정도 호흡을 관찰하며 마음을 고요히 합니다. 이어서 책을 읽어가며 밑줄을 그은 문장을 묵독하고 음미합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판을 누릅니다.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습관적으로 빠르게, 정신없이, 자판을 두드리면 사무적인 기록이 됩니다. 두드리는 자판을 인지하면서 모니터에 드러나는 글자를 집중하고 바라봅니다. 아울러 문장의 내용을 음미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처음 책을 읽을 때와 달리 그 내용들이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모니터를 고요한 수면으로 마주하고, 자판을 두드리는 손놀림은 잔잔히 흐르는 물의 속도로 이어갑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이 매우 평온해집니다.
밑줄 친 한 권의 책을 모두 사경하면 합장합니다. 사경한 글들을 소리내어 읽습니다. 다 읽고 나면 처음과 같이 3분정도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을 관찰하고 사경을 마칩니다.
실제 이렇게 모니터 사경을 하면 집중과 통찰의 수행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른바 ‘모니터 정혜쌍수(monitor 定慧雙修’입니다. <화엄경>에서는 “그 순간순간 늘, 마음이 지혜와 자비에 머물러 있으면,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다‘라고 했습니다. ’염염보리심 처처안락국(念念菩提心 處處安樂國‘입니다. 그럴진대 마음을 경건하게 가다듬고 진리를 사모하면서 말씀을 적어가는 모니터 사경 역시 수행과 법열의 안락국입니다. 나무 일체유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