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순을 맞아서도 청년 못지않은 총기를 보이는 경북 청도 운문사 회주 명성 스님
#중국과 동남아시아, 티베트까지 세계의 사찰을 다 돌아봐도 한국의 사찰만큼 품격과 아름다움을 갖춘 곳이 드물다. 일본의 사찰도 잘 가꾸어져 있지만, 산세와 어우러진 한국의 산사는 자연미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한국 사찰 중에서도 비구니 사찰들을 가보면 가람과 요리, 예불, 그리고 스님들의 걸음걸이 하나까지 정갈함과 여법함이 스며 있어 옷깃을 여미게 된다. 경북 청도 운문사는 조계종 비구니 6천여명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2100여명을 길러낸 세계 최대의 비구니 대가람이다. 그 중심에 운문사를 49년 지킨 회주 명성 스님이 있다.
» 청도 운문사는 조계종 비구니 승려 6천여명 가운데 3분의1을 교육시킨 승가대학이 있는, 세계 최대의 비구니 교육기관이 있는 곳이다.
#명성 스님이 구순을 맞아 자신의 저작을 모은 <법계 명성 전집>(전 20권·불광출판사)을 펴냈다. 통상 스님들이 80대가 되면 이야기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명성 스님의 총기는 젊은이 못지않다. 20권의 책 교열까지 직접 볼 정도다. 아직도 부축을 마다하고, 최근엔 열흘간 유럽여행도 다녀왔다. 지금도 법화경과 유마경, 열반경을 강의한다. 그의 건강과 총기의 비결은 운문사 전시관에서 지승공예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지승공예란 종이를 꼬아서 만든 종이 화병과 도자기 등 온갖 공예품을 일컫는다. 모두 그가 사경을 한 종이를 재활용해 일일이 꼬아서 만든 것이다. 이토록 멋진 작품을 만드는 억만번의 손놀림으로 정신이 녹슬 틈이 없었을 것이다.
#명성 스님은 1930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유식학의 대가로 직지사 조실을 했던 관응 스님이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그는 1952년 해인사 국일암으로 출가해 탄허·성능·운허 스님 등 당대의 학승들을 사사하고, 1970년 운문사로 옮겨와 승가대학을 열었다. 기왓장은 무너져내리고 이을 끼니마저 부족한 절을 꾸려 250명의 비구니들이 함께 살며 건물 30동을 짓고 10동을 보수했다. 그렇게 학승들도 일하는 가운데 공부·수행했기에 운문사는 농과대학 혹은 육군사관학교로 불렸다. 빈한한 절 살림에도 조금만 하자가 있으면 다시 허물고 지어야 할 정도로 꼼꼼해 제자들은 ‘0.1밀리’란 별명을 붙였다.
#80권의 화엄경 원문 전체를 4년8개월15일간 새벽마다 두시간씩 필사했다. 그 방대한 한문 글씨들이 마치 인쇄물인 듯 하나도 삐뚤거나 어긋남이 없다. ‘매사에 진실을 다하라’는 즉사이진(卽事而眞)을 좌우명으로 삼는 그답다. 그는 공부는 잘하는데 일을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공부가 삶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를 선두에서 보여줬다. 그는 ‘욕교여(欲敎餘) 선자교(先自敎)’라는 ‘불치신경’(佛治身經) 구절을 들려준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면 자신부터 교육하라’는 뜻이다. “평범한 스승은 말을 하고, 훌륭한 스승은 설명을 해요. 뛰어난 스승은 모범을 보이고, 위대한 스승은 감화를 줍니다.” 그는 “저는 그런 감화를 주는 위대한 스승이 아니다”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 명성스님 전집 20권(불광출판사 펴냄)
» 인도에서 주어온 나뭇잎 하나도 버리지않고 기념품을 만들어낸 명성 스님
#그는 무엇 하나 버리는 것이 없다. 인도에서 주워 온 보리수 한 잎도 그를 만나면 멋진 한문 글귀와 문양이 새겨진 공예품이 된다. 옛날 고속버스에 올라온 상인들을 외면할 수 없어 하나둘 사 모은 동물 인형들도 방문객에게 웃음을 안겨주는 전시품이 된다. 그러니 사람을 버릴 수는 없다. 언젠가 학인들이 화합이 안 된 한 명을 내보내지 않으면 전 대중들이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쫓아내면 어디 가서 사람이 되겠느냐’며 기어코 내보내지 않고 졸업을 시켰고, 지금은 어엿한 비구니로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단다. 명성 스님은 “용서는 저의 수행이고 칭찬이 교육의 비결”이라고 했다. 또한 ‘여성이라고 성불하지 못한다는 퇴굴심을 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부처님이 대장부이니 우리 여성도 대장부’라며 ‘비구니들도 이렇게 외쳐야 한다’고 했다. “아이 캔 두 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