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일입니다. 어느 모임에서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의기가 투합하여 금방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둘이 친하게 지내는 것을 안 다른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 친구 조심해야 해, 뒤통수를 조심하라구!!” 게름직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습니다. “알았어!! 내가 보기에는 참 좋은 친구던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 번 들은 말은 죽지 않고 고삐가 되어 그 친구를 만날 때 마다 뒤통수에 대한 경계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그 친구는 나에게 더욱 살갑게 대했고 배려도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경계심이 풀리기는커녕 더욱더 마음의 갑옷을 단단히 조였습니다. 그렇게 5년이 지났을 때 오히려 뒤통수를 조심하라던 친구로부터 배반의 칼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신감에 피를 흘리는 나를 찾아와 위로한 것은 그 친구였습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진정한 친구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시기와 질투로 이간질한 소리를 구분하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과 의심의 고삐를 놓지 못한 내 마음을 탓해야 했습니다.
시기와 질투는 쌍둥이와 같이 함께 다닙니다. 그런데 질투가 시기보다는 언니입니다. 시기가 ‘갖지 못한 사람이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는 것’이라면 질투는 ‘가진 사람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기심를 가진 사람은 대개 세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 우울감입니다. 자신이 상대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부터 오는 감정입니다. 둘째 야심입니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이기려들거나 적어도 비슷한 수준에 이르기 위해 애쓰는 것입니다. 셋째 분노입니다. 상대에 대해서 험담을 하고, 뒤에서 해코지를 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실패에 대해 은근히 좋아하거나 통쾌함을 느끼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이 시기심입니다. 시기하는 사람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험담입니다. 과장과 거짓을 섞어 상대를 중상합니다. 시기가 심한 사람들은 서로를 금새 알아보고 힘을 합쳐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동지를 만나면 죄책감이 줄어들고 그 힘은 두 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은 시기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부러워 하는 것은 지는 것이다’는 말이 있듯이 누군가를 시기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화 생물학자이며 정신과 의사인 프랑수아 를로르의 말처럼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기심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입니다. 우리 사회는 시기심을 조장함으로 이익을 추구합니다. 기업은 광고를 통해 필요 없는 물건이나 옷을 사라고 부추기고 메스컴은 보도를 통해 나와 관계없는 일에 시기심를 유발합니다. 학부모는 시기심 때문에 아이를 필요 없는 학원에 보냅니다. 시기심을 얼마나 유발했느냐를 가치로 바꾸는 것이 현대사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심은 결코 사회를 건강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동력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삶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솔직히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의 성공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타인의 성공에 진심으로 박수 쳐 주고, 타인의 실패에 진심으로 안타까워 할 수 있는 것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