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도 말이다.
대화할 때 실수를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해서 대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실수는커녕 대단한 언변으로 말솜씨를 뽐내며 좌중을 웃음으로 휘어잡았어도 결과는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 반면 실수투성이에 어눌한 말투라 할지라도 함께 대화한 사람들과 훈훈한 가슴으로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다. 관건은 감동과 이해이다. 인생의 어느 한때 큰 감동을 받은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으며, 한번쯤 또다시 찾아보고 싶게 만들곤 한다.
대단한 말솜씨로 좌중은 휘어잡았지만 감동과 이해가 전혀 없는 대화는 그때만 느끼는 재미로 끝난다. 그렇다면 큰 감동과 깊은 이해를 수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다. 소박한 마음과 함께 작은 성의만 보태면 된다.
어느 날 한 사찰의 공양간, 사시예불이 끝나면 곧 점심공양이다. 공양주 보살은 심히 걱정이었다. 30분전에 종무소에서 갑자기 성지순례객 100명이 당도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던 것이다. 50명도 아니고 100명이면 큰일이었다. 밥이야 늘 넉넉하게 해두니 상관이 없지만 반찬이 문제였다. 공양주 보살은 서둘러 장아찌와 김치 등을 준비하고 된장국을 더 끓이고 갖은 채소로 부침개를 만들었다.
점심공양을 알리는 목탁이 울리자, 드디어 성지순례객이 몰려들었다. 질서정연하게 공양을 한 순례객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맛있게 공양한 순례객이 공양주보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공양이 임박해서 갑작스레 절에 왔으니 공양주 보살에게 은근 미안한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공양주 보살님… 공양 잘 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공양주 보살은 인사한 신도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대답한다.
“네….”
“ 보살님, 반찬 모두 아주 다 맛있네요.”
또 역시 무표정이다.
“네….”
많은 신도들의 인사에 공양주 보살은 그렇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짤막하게 대답했다. 사람들은 무안하고 당황스럽다.
“공양주 보살의 얼굴이 안 좋은데 우리가 실수한 거 있어?”
성지순례객은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산문을 나섰다.
공양주 보살은 나름 애를 썼지만 친절하지 못한 무뚝뚝한 대답에는 문제가 있다. 누가 뭐라 하든 묵묵부답이라면 말을 건 사람은 얼마나 무안할 것인가. 살갑게 대하라는 것은 그리 거창하거나 어려운 말을 하라는 요구가 아니다. ‘조금만 한 발 더’ 마음을 내면 된다. 그 한발은 성의 있는 표정과 말 한마디다.
반면 어느 절의 공양주 보살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 이렇게 말한다.
“많이 드셨어요? 나름 한다고 했는데 맛은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아! 그래요. 맛 있다니 저도 좋네요.”
이렇게 응대하면 고승대덕의 심오한 법문이 아니더라도 절은 찾은 사람들은 크게 감동받는다.
아무런 대답 없이 무뚝뚝한 표정은 본인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공덕을 깎아먹는 일이기도 하다. 절집을 찾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담아 말을 해야 할 일이다. 상대방의 마음과 처지까지 헤아려서 응답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겉으로 드러나는 실수만 하지 않았다고 해서 말을 잘 하는 것은 아니다. 돈 들이지 보시할 수 있는 덕목 중에 '화안시'가 있다. 밝은 표정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태도다. 오늘날로 말하면 표정도 기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