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사에 너무 심각해서 문제다
2013년 09월 07일 <당당뉴스>지성수sydneytax1@hanmail.net
나는 못하는 것이 많지만 그 중에 하나가 사람을 만났을 때 특별한 의미 없이 주고받는 덕담이다. 뿐만 아니라 만나서 상식적인 수준의 이야기만 주고받는 대화도 딱 질색이다. 그것은 내용이 없거나 마음속에 없는 말을 못하는 까칠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 세계에서는 내가 못하는 이런 대화가 일상적이어야 한다. 목회라는 것이 사람을 대하는 영적 서비스업(?)이다 보니 어쩔 수가 없는 면이 있기는 하다. 그래서 빈 말 하는 것에 대하여 알레르기 반응을 느끼는 나 같은 과민성 환자는 목회자로서 성공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한국의 목회자들은 마치 백화점 판매원이 소비자를 상대로 하듯 가벼운 서비스가 절대로 필요한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수많은 목화자의 대열 속에 서있지 않기 때문에 조금은 이상적인 생각을 해본다.
즉 내가 만나는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관심을 가질 때 어떻게 얇은 겉치레 립서비스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서는 사람을 만났을 때 입술이 날쌘 사람은 가슴이 둔했다.
13 세기 중세 기독교의 영적 거인이었던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심지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불꽃은 점점 더 어두워지고 흐려진다.
반면에 심지로부터 높이 솟으면 솟을수록, 불꽃은 더욱 더 밝아진다.’
고 설파했다.
나는 상대방을 기분 좋고 만들기 위한 덕담들이 불꽃들이 심지에 가까워지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면 심지로부터 더 멀어져서 더 밝아지는 불꽃처럼 대화를 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이래서 내가 항상 매사에 너무 심각하기만 하다고 아내에게서 핀잔을 듣지만 말이다.
*영화 <남쪽으로 튀어> 중에서
하루는 친하게 지내는 비구니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떻게 지내세요? 하도 소식이 없어서 전화했어요. 한국 이야기 자주 하시더니 말도 없이 가버렸나 하고.”
“아무 일도 없이 지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 일도 없으면 편안해야 하는데 편안치를 못하게 보내고 있어요.”라고 답을 했다. 그랬더니 “왜 편안치를 못하세요?”라고 물었다. 그래서 ‘이 스님이 부처님은 알아도 노자는 모르는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몇 해 전에 이 현주 목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니까 “응. 아무 일도 없이 잘 지내.”라고 답을 했다. 그래서 아무개는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더니 똑 같은 대답이었다. 또 다른 누구의 근황을 물었더니 같은 대답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 목사님이 무위(無爲)를 말하고 있음을 알아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지금‘아무 일도 없이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잘 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욕망 때문이다. 즉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고 있는 욕망 때문이다.
이런 사연을 설명 했더니 스님은 “불교에서 쓰는 무애행’(無礙行)이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네요.”라고 했다.
무애행은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행동이며 어떤 사고에 의해서도 중매되지 않는 행동이다. 그러니까 '아무 개념 없는'행동인 셈이다. 쉽게 말해서 ‘그저 하는 것’이라고 표현 할 수 있는 무애행은 모든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말하는 바로 禪의 이상이다.
집 사람이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며느리에게 "애가 아무 생각이 없이 행동을 한다.”라고 말할 때 내가 "무슨 그런 과분한 칭찬을?"라고 한다. 왜냐하면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아무 생각 없이 행동 한다.’는 말은 폄하가 아니고 엄청난 찬사인 셈이기 때문이다. 무애행의 경지는 아무 생각이 없이도 모든 것에 이해가 가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의 ‘무위사상은’ 벼라 별 해석이 다 있지만 나로서는 ‘억지로 하려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하도록 한다.’는 정도로 이해하려고 한다.
환자가 이빨을 수리하러 와도 왠만 하면 손대지 않고 그냥 쓰도록 하는 치과의사도 있고 소송을 맡기러 상담하러 온 고객에게 왠만 하면 소송을 하지 말고 해결하라고 권유하는 변호사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위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베를린> 중에서
무의를 실천하려면 우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할 터인데 역사적으로 무위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데 바로 우리가 무정부주의자로 알고 있는 미하일 바쿠닌 이라는 인물이다. 바쿠닌은 19 세기 중반 유럽 혁명전선에서 마르크스와 쌍벽을 이룰만한 라이벌이었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바쿠닌은 마르크스와 평생을 싸우다가 패배자로 철저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는 혁명을 위해서 전 생애를 바쳐서 혁명의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 쫒아 다니면서 불을 지폈지만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냉정하고 이루어낸 성과도 별로 없이 말년을 비참하게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다 죽었다. 그에 대한 평가는 “항상 임신 3 개월을 9 개월로 오인했다.”고 하는 것이다.
*미하일 바쿠닌
그러면 예수는 어떠했던가?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을 알면서도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떼어 주면서 ‘내 할 일을 하라.’고 했다. 죽음조차도 때에 자기를 맡기는 모습에서 ’무위‘의 완성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