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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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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사랑하는 자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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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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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은행나무를 찾아갑니다. 무려 수령이 팔백 년인 수도승 같은 은행나무. 그 큰 나무 그늘 밑에 작은 옹이처럼 몸을 낮춰 앉아 있으면, 노란 법어(法語)들이 바람결에 우수수 쏟아져 내리기도 합니다. 큰 말씀, 큰 사랑, 큰 인내를 품은 고독의 시 한 그루. 그 오랜 세월의 거대한 몸피를 우쭐우쭐 뽐내지도 않으면서, 무심코 풍성한 잎새를 비우고 채우며 건너왔을, 숭고한 고독의 무늬…. 나는 곧잘 그를 고독의 왕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고독을 두려워하지요. 잠시도 홀로 있으려 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장돌뱅이처럼 늘 저자거리를 헤매고, 존재의 중심에 뿌리박지 못한 채 ‘빨리 빨리’를 외치는 속도의 악령에게 생을 저당 잡혔습니다. 생을 저당 잡힌 자는 아름다운 관계를 소유로 바꾸려 애면글면하지요. 미소와 친절, 여유, 경청과 같은 아름다운 잎새는 고요한 마음 둥치에서만 피어날 수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나와 쉬어라!’는 예수님의 신성한 초대도 듣지 못한 채. 


자기 주변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감정을 외로움이라고 부릅니다. 톱날에 잘린 나뭇가지처럼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괴로움이지요.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나는 자주 그런 느낌에 시달렸습니다. 고독과 외로움이 다르다는 것을 이제 조금은 알겠습니다. 진정한 고독의 내실로 들어가면 외로움의 상태는 극복되고, 나를 둘러싼 것들이 나와 하나라는 것을 또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휘묻이한 나뭇가지가 땅에 새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단절된 관계도 싱그럽게 복원되고, 우리 마음귀가 크게 열려 ‘고독의 빈들로 우리를 꾀어내는 하느님의 사랑의 속삭임’(호세아 2: 4)도 들을 수 있습니다. 존재의 결핍은 극복되고, ‘하느님, 당신 한 분으로 족합니다!’란 싹싹한 고백이 내 영혼의 뜰을 넉넉히 채우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자기 주변으로 좁혀 들어오고, 고독은 무한을 향해 뻗어나간다.”(켄트 너번) 그렇습니다. 나무가 길을 잃지 않고 홀로 푸른 가지를 허공으로 뻗어나가듯 고독의 심연에 머물기를 사랑하는 시인은 “영원의 먼 끝”인 무한을 향해 매순간 뻗어나갈 수 있습니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연둣빛 새싹 같은 신생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고독, 홀로 있음의 영광.” 신학자 폴 틸리히는 유한한 존재의 팔을 내밀어 저 무한의 하늘에 덥석 안기는 은총의 시간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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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고독을 ‘종교성’이라 일컬었지요. 실제로 많은 수도자들은 고독 속에서 하느님의 내밀한 숨결에 닿기를 소망했고, 고독이 만들어내는 내밀한 공간에 머물며 세상에서 다친 몸과 마음을 치유 받았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환경 보호’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으슥한 숲이나 동굴, 사나운 짐승들이 울부짖는 광야를 영혼의 보금자리로 삼았던 이들은 영혼의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방패막이가 되어줄 ‘고독’이라는 보호구역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고독은 우리를 치유할 뿐만 아니라 창조성까지 선물합니다. 위대한 시인이나 예술가, 수도자들은 모두 고독 속에서 뛰어난 삶의 걸작(傑作)들을 꽃피울 수 있었지요.


사랑 또한 고독의 토양에서 피어나는 꽃이 아니던가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종종 서로 떨어져 있어야 건강해집니다. 고독 속에 머물면서 메마른 마음에 촉촉한 사랑의 물기가 고여야 비로소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를 깊이 포용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여러 시간의 대화보다 한 시간의 고독이 사랑하는 이들을 훨씬 더 친밀하게 만드는 것. 고독이 베푸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이 놀라운 선물을 맛본 사람은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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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누구보다도 대담하게 고독을 추구했고, 고독한 순간들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지켜나갔습니다. 어느 날 예수가 빵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베풀어 수천 명을 먹이자 흥분한 군중들이 예수를 임금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것을 눈치 챈 예수는 곧 흥분한 무리를 빠져나와, 따로 기도하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날이 이미 저물었지만, 그는 거기 홀로 있었습니다.(마태 14: 23) 
예수는 어느 나무 밑이나 바위동굴 같은 데서 홀로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새벽이슬에 함초롬히 젖어 해님 같은 꽃얼굴로 하룻길을 떠났을 것입니다. 고독을 사랑함으로 존재의 중심을 잡고 홀로 우뚝 선 나무처럼 예수는 고독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고독의 공간 속에서 생명의 주재이신 하느님과 하나 되는 융융한 희열을 맛보았고, 생기에 가득 찬 목소리로 거친 길 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을 것입니다. 나는 예수가 걸어간 이 성스러운 고독에 김현승 시인의 ‘절대 고독’을 포개어봅니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가을의 기도> 부분

 

 

우리를 ‘고독의 내실’(內室)로 초대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준다.

 
시인은 고독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과 조우하고,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으로 그 희열을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고독을 사랑하는 자의 기쁨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회복한 자의 기쁨이고, 만물과 내가 한 몸이라는 우주의 신비를 깨닫고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자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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