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은데 왜 하라는 거야?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루가 13,22~30)”
“출입문을 왜 이렇게 좁게 만들었지? 처음부터 좀 넓게 만들었어야 하잖아!”
맞는 생각이지만 하느님 맘대로 하시는 일에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을 찾아보거나 꼭 들어가고 싶거든 내 몸을 줄일 수밖에 없지요.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진리의 기준이 좁은 문입니다. 문이 좁다는 것은 들어갈 물건이 크다는 말과 같습니다. 물건이 문 사이즈보다 적으면 충분히 넓은 문입니다. 그래서 좁은 문에 들어가려는 자 누구나 자기 몸을 좁게 맞추고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과 관념을 줄이거나 버리고 욕심을 비우고 가진 권위와 재물과 명예를 내려놓고, 자기 몸을 줄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문제해결의 기준을 찾는 방식에는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먼저 상대적 대상인가 절대적 대상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은 서로 생각을 나누어서 공감성을 찾아내도록 하는 것이 해답이고 절대적 대상 앞에는 내 이유가 작다고 판단하고 따름과 순명이 해답입니다. 제자의 삶을 ‘제자도’ 라고 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신앙적으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 가운데서는 무엇이 진리인가? 나를 압도하는 큰 조직의 힘인가? 시스템인가? 교조적 원칙인가? 전통과 관습인가? 법과 윤리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조직과 국가 시스템과 교의와 전통 관습 법 윤리가 진리에 부합될 때만 인정됩니다. 무엇이 진리일까요?
절대 진리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차원이기 때문에 ’우선적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검증방법은 단순합니다.
1) 생태의 법칙(자연의 질서를 존중하고 따르는 것)
2) 공리의 자유(서로에게 좋으면서도 타자의 실현을 침해하지 않는 것)
3) 역사의 존중(공동체 경험으로 검증된 결론) 같은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요.
공동생활에서는 자신이 공동체 보다 더 크면 참 어려울 것입니다. 내 생각보다 공동체 함의 의 결론을 크게 여기고 우선시 하는 순명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저는 늘 말합니다. [열심한 신심과 좋은 생각으로 모인 삶이 공동체가 아니고 공동체의 믿음과 생각과 삶을 공유하는 삶이 공동체] 이다. 이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좋은 생각’이 검증되지도 않았고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지요.
‘내가 싫다는데 왜 꼭 나보고 하라느냐?’ 와 ‘하라는데 왜 싫다고 하느냐?’ 의 충돌이 늘 있습니다. 이런 때에는 호흡을 가다듬고 위의 세가지 기준에서 성찰해 보는 것이 습관이 되게 함이 좋겠습니다.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 무엇을 더 크게 보고 우위에 둘 것인가?로 결정해야 합니다.
삶이란 것이 그렇지요.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도 없고 자기 방식만 고집할 수도 없고, 더러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는 거 아닙니까? “떠날 때는 돈도 지팡이도 신발도 가지지 말라.” 는 스승의 뜻을 거스린 사도는 없었습니다. 몸의 지체들이 싫어도 가야할 길로 받아들일 때 공동체의 힘과 질서가 생깁니다. 내 생각과 몸을 줄이면 공동생활이라는 문과 방이 결코 좁지 않습니다.
모든 멤버는 공동체 가치에 순종해야 함과 동시에 공동체는 진리성을 담보해야 합니다. 멤버들이 아무 생각 없이 따라도 모두 진리를 향해 가는 항해여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자기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필요할 것 같은 것’은 모두 갖추고 ‘가고 싶은 곳과 이벤트’ 는 갈 수 있어야 행복이라 여깁니다. 개성과 자유를 주장합니다. 자식도 그렇게 기릅니다. 문제는 그런 결과가 실패했다는 것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업주의는 그런 대중을 대상으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환상적인 마케팅을 펼칩니다.
어쩌다 성공한 사례가 곧 자신이나 자녀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거 같습니다. 그건 일반적 보편적 귀결이 아닙니다. 전국적인 뉴스감이 되기 때문에 기사가 되고 나까지 알게 된 것인데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야만 보편성이 되는 것이지요. 엄청난 진짜 무지하게 엄청난 착각입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듯 매출에 혈안이 된 상업주의가 시대를 주도하고 진리의 자리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의 태도들이 고스란히 공동생활로 유입되고 자리를 넓혀가고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지키려는 전통은 고독해져 갑니다.
잘못된 길은 멀리 갈수록 돌아와야 할 길이 멀어집니다. 너무 멀면 포기하게 됩니다. 갈라서게 됩니다. 더군다나 좁은 천국의 문은 더욱 작아지고 더 멀어집니다. 내 생각은 공동체 생각과 어떤 간극이 있는가? 늘 성찰하고 다짐해야 합니다. *
아이고 어깨 아파라! (2013.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