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적 가치’ 품은 사람에겐 무슨 일이든 농사랍니다
[인터뷰] 풀무학교 졸업 후 가톨릭농민회 일꾼 된 박푸른들 씨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3.12.17 문양효숙 기자 | free_flying@catholicnews.co.kr
대한민국의 10대는 ‘현재’를 살지 않는다. 그들의 현재는 보다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그들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무언가를 포기하라고 배운다. 미래의 행복은 ‘꿈’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한다. 세상은 10대에게 꿈을 찾고 목표를 세워 그 길로 매진하라고 부추긴다.
하지만 10대가 삶의 목표나 ‘꿈’을 찾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상의 범주가 학교와 학원, 집을 맴도는 이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삶의 경험이 다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욕망이 자신의 것인지, 부모의 것인지, 세상의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나이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을 찾으라는 세상의 주문은 때로 막막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어렵게 한 선택조차 부모 혹은 세상과 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니 10대에게 선택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박푸른들 씨는 태어나서 10대를 거쳐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 모든 선택을 그리 어렵지 않게 했다. 본인은 ‘자연스러웠다’고, 혹은 ‘당연했다’고 표현했다. 푸른들 씨가 선택한 길은 ‘농사’였다.
“마을 덕분이었어요. 고등학교 입학, 그리고 ‘전공부’를 선택하기까지 모든 게 자연스러웠죠.”
▲ 박푸른들 씨의 풀무학교 졸업 후, 첫 일터는 ‘마을’이었다. 2년간 마을을 기록하는 일을 했던 푸른들 씨는 그 시간을 “생애 최고의 배움터”였다고 표현했다. ⓒ문양효숙 기자
풀무학교 그리고 홍동면에서 보낸 시간, “생애 최고의 배움터였어요”
박푸른들 씨는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에서 태어나 22년간 마을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유기농업을 하는 농사꾼이었고, 어머니는 마을 어린이집에서 일했다. 마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학교라 할 수 있는 풀무학교가 있었다. 그곳에서 고등과정을 마치고 대학과정에 해당하는 ‘전공부’에서 2년간 본격적으로 농사를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농사를 ‘감성적으로’ 배웠다면, 전공부에서는 ‘구체적으로’ 배웠다고 했다. 졸업 후, 첫 일터도 ‘마을’이었다. 2년간 마을을 기록하는 일을 했던 푸른들 씨는 그 시간을 “생애 최고의 배움터”였다고 표현했다.
“잠자는 것도 아까울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처음에 일을 시작할 때엔 작은 사무실에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있었고, 주어진 일은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저는 그저 ‘마을을 기록하고 싶어’하면서 앉아있던 애였고요. 그런데 함께 일한 선생님께서 지금 여기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구상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그는 마을을 기록하면서 오랜 시간 마을에 살면서 품었던 불만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마을의 어떤 모습이 자신이 미워해야 할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니, 부모와 이웃, 친구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다. 스스로에게 치유의 시간이었다.
마을에서 ‘일’은 돈이나 성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같이 작업한 스승은 무엇을 하든 공적(公的)인 영역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었다. ‘기록하는 게 좋다’는 푸른들 씨의 욕구를 마을과 연결시켰고, 다양한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작업으로 엮어냈다.
“‘꼭 농사를 짓지 않아도 된다. 농업에서 네가 좋아하는 일을 발견하고 진행해가면 마을은 너희를 지원할거다.’ 이런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들어왔어요.”
이런 마을 분위기 덕분에 푸른들 씨와 함께 전공부에서 공부한 선후배들도 마을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이는 친구들을 모아 교육농업연구소 일을, 또 어떤 이는 논에 사는 생물을 관찰하고 정비하는 일을 한다. 어른들과 대화하는 걸 즐거워하던 친구는 농업작목반 간사 역할을 한다.
▲ 풀무학교에서 농사를 배우던 시절의 박푸른들 씨 (사진 제공 / 박푸른들)
마을에서의 24년을 뒤로하고 서울로
“다양함을 만나고 싶었어요”
하지만 푸른들 씨는 지금 이런 마을을 떠나 서울에 산다. 2년 전 닥친 고비 때문이다. 어찌 보면 큰 은총일 수 있을법한 ‘자연스러운’ 삶이 모두 마을과 마을 어른들의 ‘후광’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즐거웠던 일터에서도 스스로 정체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독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뿌리를 찾거나 정착하고 싶은 욕구가 보통 나이가 들어서 생기잖아요. 어려서부터 그런 가치를 당연한 듯 배우면 어떤 시점에 방황이나 자유에 대한 욕구가 생길 것 같아요.”
“맞아요. 그랬죠. 뿌리내리는 삶, 한 가지 일을 10년 동안 하는 것, 하나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것, 공적인 사고. 어려서부터 이런 가치들을 중요하게 배워왔어요.”
“부모님은 걱정하시지 않았어요?”
“오히려 엄마, 아빠는 계속 마을 밖으로 나갔다 오라며 서울행을 지지하셨어요. 지금 나가지 않으면 앞으로는 더 겁이 날거라고. 그럼 못나갈 거라고. 저는 안주하려고 했는데. 결국 전공부 졸업하고 2년 버티다 나왔어요.”
“든든한 고향을 떠나서 낯선 도시로 훌쩍 떠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아요. 용감하시네요.”
“그렇죠. 그러고 보면 훌륭한 사람이 많네요. 왜, 도시로 대학가는 사람들 모두 20여 년 살던 마을을 떠나는 거잖아요. 자기 습성을 바꾸는 건데. 다들 대단해요.”
“그래서, 어떻게 도시 생활 적응은 수월하셨어요?”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는데요. 아, 제가 서울 간다니까 홍순명 선생님(* 풀무학교 전 교장. 풀무학교에서 42년 동안 교사, 교장으로 일했다)께서 ‘뉴스나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가 전부 서울 이야기니까 적응하기 쉬울 거야’ 하셨는데, 하하.”
서울에 와서 1년은 아주 바쁘게 살았다. 다양한 공부 모임에 참여하고, 사진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엮어내는 ‘사진아카이브연구소’와 커피와 빵을 배우는 ‘햇빛부엌’에서 인턴으로 일하기도 했다. 일주일 내내 모임이나 약속이 없는 날이 없었다. 바쁘게 살았던 건 최대한 더 넓은 세상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을을 떠나올 때, ‘다양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가 가장 컸다고 했다. 원하던 다양함을 만났는지 물으니,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답한다.
“홍동에서는 한 가지 일을 하고, 뿌리내리는 삶에 가치를 매겨요. 그런데 제가 서울에서 한 어떤 모임에서는 사람들이 가볍게 무언가를 하다가 떠나고 싶을 때 훌쩍 떠나기도 했어요. 인권이나 생태를 아주 중요시 여기지만 일상에서는 훨씬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도 만났고요. 홍동에서는, 어렵지만 ‘언행일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하거든요. 이젠 그런 사람을 만나도 ‘어? 저 사람 뭐야?’ 하고 걸러내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울에서, 홍동면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이들과의 만남을 거쳐 박푸른들 씨가 정착한 곳은 가톨릭농민회다. 푸른들 씨는 7개월 전부터, 가톨릭농민회 생명농업실천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 농민들이 생명농업을 하는 규정을 농민과 도시생활공동체가 함께 정하는데, 푸른들 씨는 그것을 협의하고 공유하는 작업을 함께하고 있다. 푸른들 씨는 “‘완결성 있는 일을 하려면 오래 기다려야 된다’고 하셨다. 가농 들어온 뒤 6개월간 공부만 했다”며 “정말 멋지지 않냐”고 묻는다. 그는 농민들이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마음을 다해 듣고 있다고 했다.
▲ “다양함을 만나고 싶어서 마을을 떠나왔다”는 박푸른들 씨 ⓒ문양효숙 기자
“어디론가 나가고 싶은 마음 잠재울 수 있을 때,
당연히 농사를 지을 거예요”
두 달 후면 서울에 온지 2년이 된다. 부재를 경험한 뒤 존재의 가치를 깨닫듯, 안에 머물러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밖으로 나오면 그때서야 볼 수 있는 것들, 소중한 것도, 아쉬운 것도 그렇다. 푸른들 씨에게 서울에서 발견한 풀무학교와 마을의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물었다.
“‘농적인 가치’가 떠오르네요. 농업과 직접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농적인 가치를 품고 있으면, 무슨 일을 하든 농사다. 농사와 연관성이 있다’는 말을 듣고 살았어요. 제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것 같아요.”
“앞으로 농사지을 계획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우문(愚問)이겠네요. 뭘 하더라도 가치를 품고 있으면 농사니까요.”
“음, 저는 농촌에서 태어나 쭉 살아왔기 때문에 농촌의 습성을 지니고 있어요. 농촌에 있는 게 훨씬 편하고 자유로워요. 하지만 지금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렇고 자꾸 어디로 튀어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그런데 농사는 책임져야 할 게 있으니까요. 더구나 유기농업은 더 그렇죠. 땅을 관리해야 하고 땅의 리듬을 깨뜨리면 안 되니까, 장기적으로 책임져야 하거든요. 그럼 튀어나가면 안 되잖아요. 땅에 붙어 있어야지. 이 마음을 잠재울 수 있을 때가 되면, 당연히 농사를 지을 거라고 생각해요.”
도시에서의 삶이 고독하다면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으로 홀로 있는 외로움을 넘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나 근원적으로 돌아갈 고향의 부재 때문이리라. 서울시가 진행하는 마을 공동체 사업은 그런 고독함을 이해한 도시가 건네는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도시인에게는 이상향과 같은 마을 공동체에서 나고 자란 박푸른들 씨. 마을이라는 든든한 울타리에서 땅을 딛고 살아온 까닭일까. 자유도, 일탈마저도, 그의 것은 단단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좀 더 가벼워지고 싶다”고 했다.
“너무 많은 의미부여를 해왔던 건 아닐까 해서요. 좀 더 가볍게 행동하고, 달아나기도 하고, 바람처럼.”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