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이 모습>
시위 현장의 문익환
1980년대 거리에서 최루탄이 발사되면 시위대는 눈물 때문에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다. 구토를 하고 호흡곤란을 일으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이 되곤했다. 그래서 최루탄과 페퍼포그 발사음이 들리면 누구나 도망가기에 바빴다.
“최루탄은 견뎌내기 어려웠다. 이내 대열은 흩어졌다. 그런데 연기처럼 뿌연 최루가스 속에 문익환 목사님은 큰 눈을 깜빡깜빡하며 홀로 서 있곤 했다. 그렇게 최루탄을 하얗게 뒤집어쓴 채 서있던 그가 눈에 선하다.”
종교인 막내로 한편을 지켰던 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진관 스님의 회고다. 광야의 선지자처럼, 바위처럼 서 있던 그는 운동권 투사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 문익환을 아는 이들은 그가 바위와는 동떨어진 풀이나 꽃처럼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였다고 말한다. 그는 시집을 7권이나 낸 시인이었다. 또 도쿄신학교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서학자였다. 그는 개신교와 천주교가 성서를 공동으로 번역한 신구교 공동번역성서의 구약 책임자로 번역을 총괄하기도 했다. 그때 문익환은 어려운 한자 투의 문체를 시적인 운율을 살려 맛깔스러운 언어로 되살려 냈다. 성서 안에서 전형적인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로 살아온 문익환이 불의한 세상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은 1975년 절친한 친구 장준하의 죽음 이후였다. 유신반대 투쟁에 나선 문익환은 이후 신군부 등에 의해 무려 7차례 감옥을 가 11년의 옥살이를 했다.
1991년 강경대군 장례식을 하며 거리행진중인 문익환 목사. 사진 <한겨레> 자료
1993년 민주항징 6돌 기념을 맞아 명동에서 거리행진 중인 문익환 목사. 사진 <한겨레> 자료
거리에서 경찰에 연행되는 문익환 목사. 사진 <한겨레> 자료
1990년 문익환 목사 어머니 김신묵여사가 별세했을 때 빈소에서 고은시인과 함께 춤을 추는 문 목사. 사진 <한겨레> 자료
“동생 문동환 목사님이 성격이 느긋하고 포용적인 데 반해 문익환 목사님은 원래 감수성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기도 했다. 목사로서 사람들을 푸근히 끌어안는 편도 아니었다. 그런데 감옥에 다녀오면서 변하기 시작해 부드러워지고 넓어졌다. 교수로서도 엄하기만 했던 그분이 세배를 가면 양말부터 벗으라고 해 감옥에서 배운 민간요법으로 아픈 데를 치료해줄 만큼 변했다.”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또 “감옥에서 단련된 문익환은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장공 김재준 목사(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와 함석헌 선생을 종합한 듯했다”고 회고했다.
오는 18일은 문 목사가 별세한 지 20주기다. 17일 서울 수유동 한신대 채플실에서, 기일인 18일 오후 2시엔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에서 추모예배가 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