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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는 "개처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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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인문학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광고인 박웅현

 

<법보신문> 2014.1.6 김형규 기자  |  kimh@beopbo.com

 

조계종 교육원 특강에 강사로 참여
스님들에게 인기 있는 인물 꼽혀
인문학은 삶의 결을 만지는 촉수
사람 향기로 광고제작 새 지평 열어

화두도 세월 지나니 조금씩 이해
불교 살아있는 한국서 태어난 건 복

 

    

박웅현1.jpg
▲ 광고인 박웅현

 

 

시대가 바뀌었다. 전통적인 교육방식을 답습하던 승가교육체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조계종 승가교육과정 개편 때문이다.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외부특강이 많이 늘었다. 무엇보다 인문학 관련 특강이 대폭 늘었다. 사회에서 주목받는 다양한 사람들이 특강형식으로 무시로 절집안의 문턱을 넘나들고 있다. 특히 특강 이후 스님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급상승한 인물이 있다. 박웅현(52)이다.

그는 세계 최대 광고 그룹 미국 옴미콤의 주력 광고대행사 TBWA 한국법인의 광고제작 총 책임을 맡고 있다. 넓게 말하면 광고인,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광고기획제작자이다. 물욕을 극대화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광고제작자의 강의에 물욕을 덜어내기 위해 출가 수행하는 스님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 자체가 이례적이다.

 

그러나 그의 광고를 보면 이해가 간다. 그의 광고는 따뜻하다. 정(情)이 흐른다. 그의 광고에는 사람에 대한 배려, 존중, 소통이 들어있다. 세상을 향한 포근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녀의 자전거가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왔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생활의 중심, 사람을 향합니다.” “생각이 에너지다.” “진심이 짓습니다.” 주변에서 보는 흔한 광고들과 무언가 다르다. 대놓고 제품을 선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업홍보 같지도 않다. 광고는 광고인데 무언가 뜨겁고 묵직하다.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는 이를 인문학을 통한 진심의 힘이라고 믿는다.

 

그는 광고기획제작자로서도 성공했지만 출판계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공저인 ‘인문학으로 광고하기’ 이후 펴낸 ‘책은 도끼다’ ‘여덟단어’ 등이 대중의 시선을 끌고 있다. 특히 ‘여덟단어’는 올해 예스24 다독가들이 선정한 올해의 책 분야 10위에 올랐다. 소설이나 광고 관련 책이 아닌 인문학, 그것도 광고인이 쓴 인문학 책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인문학은 그에게 얼어붙은 감성을 두드려 깨는 도끼다.

 

젊은 시절, 그는 광고계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지만 방송이나 언론계로 가지 못했다. 뒤늦게 제일기획에 들어갔지만 회의에 방해만 된다는 이유로 3년 동안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시절 고전(古典)에 주목했다. 치열한 인문학 탐독은 ‘인문학으로 광고하기’라는 독특한 트렌드를 만들어 내며 가장 주목받는 광고인의 길을 걷게 했다.

 

세월의 덧없음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힘을 발휘하는 고전은 옛 사람들이 전하는 빛나는 보석이며 꺼내 써도 줄지 않는 창의력의 원동력이다. 그러나 그의 인문학은 문사철(文史哲)이라는 고전적 인문학의 개념과 다르다. 삶의 촉수를 예민하게 하는 모든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을 한다고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적어도 밥맛을 좋게 하는 것이 그의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사물의 본질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마음을 맑혀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 창의력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것처럼 경탄하며 보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시(視)가 아닌 견(見)이고, 청(聽)이 아닌 문(聞)이라고 말한다.

 

그의 삶의 신조는 ‘개처럼 살자’다. 막 살자는 말처럼 들리겠지만 담긴 뜻은 선사들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개는 밥을 주면 처음 본 것처럼 즐겁게 먹는다. 쉴 때는 처음 쉬는 것처럼 휴식을 취하고, 꼬리를 흔들 때도 최선을 다해 흔든다. 혹시라도 꼬리를 적게 흔들었는지 걱정하지도 않는다.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목표는 카르페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는 생각의 상당부분 불교적인 사유와 맞닿아 있다. 그는 막연하게 느꼈던 ‘뜰 앞의 잣나무’나 ‘오직 할뿐’이라는 선사들의 가르침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렴풋이 짐작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깊은 불교의 전통이 흐르는 한국에 태어난 것이 큰 복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의문’으로 대답했다. 제일 중요한 시간은 인터뷰 하는 바로 지금 이 시간이고, 제일 중요한 사람은 앞에 마주하고 있는 당신이며, 제일 중요한 일은 현재의 인터뷰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라는 것.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그는 인터뷰 내내 마치 처음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열과 성을 다했다.


박웅현2.jpg 
▲ 박웅현은 인터뷰 중에도 깊은 이해를 이끌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고민의 모습들을 보여주곤 했다.

인터뷰가 진행된 그의 사무실 한편에는 손수 써 붙인 메모가 빼곡했고,

책상에는 최근 읽고 있는 몇 권의 책들이 올려져 있었다. 이를 통해 그의 삶의 결을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인문학이 대세다. 그런데 인문학이 스펙 쌓기의 일환이 된 느낌이다. 인문학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삶을 만지는 촉수를 인문학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인문학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강의 제목이 ‘인문학이라고 하는 촉수에 관하여’였다. 인문적인 훈련을 한 사람은 밥을 먹어도 더 맛있게 먹고, 계절의 변화에도 더욱 민감하다. 사물 하나하나에서도 더 큰 즐거움을 얻는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이다. 삶의 촉수를 예민하게 하는 것이다.

 

▲광고인이 인문학을 하는 것이 평범하지는 않다. 인문학으로 광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광고는 기업의 메시지를 불특정 다수에게 송출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고를 위해서는 두 가지 공부를 해야 한다. 하나는 기업을 공부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다. 기업에 대한 공부는 상대적으로 쉽다. 어려운 것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문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한다. 어떤 음악에 눈물을 흘리고, 어떤 드라마를 좋아하는지. 이런 것들을 알아야 광고를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인문학이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 차이는 인정한다 차별에는 도전한다와 같은 광고는 단순히 기업의 홍보 차원을 넘어서 대사회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고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아는데.
“광고가 불특정 다수 사람들의 마음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않으면 안된다.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말이다. 광고는 전위예술과 다르다. 예술은 지금 인정을 받지 못하더라도 50년 후에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고는 동시대에 살아남지 못하면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들이 어느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기업 또한 큰 의미에서 사람이다. 그래서 법인(法人) 아닌가. 이런 이유로 기업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광고에 대사회적인 의미를 담는 이유다.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래서 기업도 광고를 통해 말을 하는 것이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고 생각한다.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에는 도전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 생각이 에너지 아닌가.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업주에게 동의를 구하는 과정들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물론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사회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진심을 다한 설득의 과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진심의 힘은 의외로 크다. 그리고 올바른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도 없다.”

 

▲인문학적으로 산다는 것, 이를 통해 풍요롭게 산다는 것은 결국 지적인 생활이다. 또 어느 정도 삶의 기반이 갖춰진 여유에서나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동의한다. 들을만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촉수를 예민하게 한다는 것이 책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여행도 있고 대화도 있고 사색도 있다. 그렇지만 가장 손쉬운 것은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가 100명의 사람을 만난다고 했을 때 10명 정도는 직접 만날 수 있겠지만 90명은 책을 통해서 만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책을 낸 사람들 대부분은 지적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지적인 삶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적인 삶이 결코 병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시청(視聽)이 아니라 견문(見聞)을 해야한다고 이야기했다. 견문은 사물을 나의 감성으로 읽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나.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심지기의(心知基意)’라는 내용이 있다.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안다고 생각하지만 진짜로 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되나. 오히려 막연하게 안다는 생각이 진정 알아야 할 것들을 가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안다는 생각 때문에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기의’는 마음으로 알지 못하면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시청의 의미다. 그냥 흘려보고 흘려듣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가서 보고 듣는 견문을 하면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세월이 흐르면서 인류의 삶은 크게 변한 것 같지만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를 만나고 가정을 꾸리고 나이가 들어가고 늙어가고. 달라진 것이 없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인 현상 자체는 다르지 않다. 지혜로운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이나 똑같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같은 현상을 보면서도 다른 삶을 산다. 견문한 사람이다. 우리가 보는 담쟁이를 도종환 시인도 보았고, 우리가 먹는 간장게장을 안도현 시인도 먹었다. 우리가 봤던 낙엽을 장자도 봤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뚫고 나간 길을 봐라. 서로의 삶이 달라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바로 우리 눈이 문제다. 귀가 문제다. 보이는 사물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보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 견문을 한다는 것은 지혜롭고 풍요롭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은 도끼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독(多讀)보다는 정독(情讀)을 이야기했는데, 어떤 식으로 독서를 하고 있나.
“많이 읽기보다는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하루에 100페이지를 읽든 10페이지를 읽든 중요하지 않다. 천천히 읽다가 좋은 부분이 있으면 밑줄을 친다. 그리고 필요하면 메모를 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줄친 부분을 컴퓨터로 정리한다. 이렇게 하면 책 한권을 3번 읽은 효과를 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정독이라고 생각한다. 책 읽기는 교감이다.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읽은 책이 내 속에 들어와서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야 한다. 그래야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비록 1년 동안 한권의 책 밖에 못 읽었더라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달라져 있어야 한다. 책이 얼어붙은 감성을 부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책은 도끼다’라고 말한 의미다.”

 

▲책 선택의 기준은 무엇인가.
“세 가지 정도가 있다. 주변에 존경하는 선후배가 많이 있다. 먼저 그들의 추천을 받는다. 두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을 읽는다. 마지막으로 특별한 책이 없으면 무조건 고전(古典)으로 들어간다.”

 

▲광고는 결국 욕망을 극대화 하는 것이다. 인문학으로 광고를 포장하는 것은 아닌지.
“무서운 질문이다. 그러나 나는 도덕 교과서를 쓰려고 광고를 하진 않는다. 먹고 살려고 광고한다. 먹고 사는 삶 속에서 선택한 것이 광고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그렇게까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부정적인 일인가. 사회병폐를 키우는 일인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것은 광고가 가지고 있는 진실의 한 측면만을 본 것이다. 뉴스를 보다보면 사람 3000명이 죽었다는 내용을 무덤덤하게 전하고 바로 김연아 선수가 어떻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올바른 태도인가. 과연 뉴스가 죽은 사람들에 대해 어떤 리스펙트(respect)를 주는가. 존중의 의미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후진 판사는 훌륭한 조폭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결국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라는 의미다. 자기가 하는 일에서 긍정의 면을 어떻게 뽑아내느냐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광고에 대한 왜곡된 편견이 있다. 이것은 한쪽 측면만을 생각한 것이다. 반대로 책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긍정하는 편견이 있는 것 같은데, 좋지 못한 책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광고는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청바지와 넥타이는 평등하다거나 생각이 에너지라는 광고는 사회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잘 만든 광고는 파급력이 크다. 또 다른 메스미디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가장 세련된 사유체계…명료하고 담박하다”

‘개처럼 살자’는 생활 신조는
‘뜰 앞의 잣나무’와 비슷한 뜻

 흘려 보지 않고 마음으로 봐야
 견문이 되고 삶 또한 풍요로워

 고전과 같은 인문학 서적들은
 얼어붙은 감성 깨부수는 도끼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 감명
 앞으론 분리 아닌 협업의 시대

 

 박웅현3.jpg   
▲ 박웅현의 광고는 따뜻하다. 정(情)이 흐른다. 사람에 대한 배려, 존중, 소통이 들어있다. 세상을 향한 포근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주변에서 보는 흔한 광고들과는 무언가 다르다. 대놓고 제품을 선전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업홍보를 하는 것 같지도 않다. 광고는 광고인데 무언가 뜨겁고 묵직하다.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는 이를 인문학을 통한 진심의 힘이라고 믿고 있다.

 

▲분리보다는 융합, 경쟁보다는 협업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이라 말했다. 원효의 화쟁(和諍) 사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양(陽)이 차오르면 음(陰)이 올라오게 돼 있다는 문장을 좋아한다. 지금에 딱 맞는 말이다. 이성과 논리, 분석과 과학 등 서구의 양이 너무 차올라서 이제 섞여야 할 시점이 온 것 같다. 산업화 시대에서 발전한 분업의 효용성은 이미 끝난 것 같다. 산업화, 정보화 시대를 거쳐 이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나는 새로운 동력은 창의적인 생각들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융합과 협업이 중요하다. 다시 다빈치의 시대가 된 것이다. 전인적인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 미셀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에 이런 구절이 있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과학자는 최악의 과학자이고,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술가는 최악의 예술가다. 이게 섞여가는 과정이다. 융합이 중요하다. 원효의 화쟁과 상통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내용을 삶이 주는 준엄함 속에서 촉(觸)으로 알게 된 것일 뿐이다. 불교와 이렇게 연결되는지는 몰랐다.”

 

▲신문사와 방송 쪽으로 진출하려다 광고 쪽으로 갔다고 들었다. 광고계에 와서도 3년 동안 별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등 시련이 많았다는데 어떻게 극복을 했는지.
“특별하게 나에게 시련이 많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인생인들 그 정도 시련이 없었겠는가. 신념으로 버틴 것도 아니다. 그냥 어떻게 살아남을까 고민한 결과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뿐이다. 나는 영웅담이 두렵다. 그리고 나 또한 영웅이 아니다. 영웅담은 어떤 목표에 이른 사람이 거기에 이른 과정을 나중에 극화시킨 것일 뿐이다. 실제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99.99% 대다수 사람들은 먹고 살려고 하는 것뿐이다. 밥벌이의 준엄함이 인정돼야 한다.”

 

▲삶의 신조인 ‘개처럼 사는 것’의 의미가 숭산 스님의 ‘오직 할뿐’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선심(禪心)은 초심(初心)이라는 말도 있다. 같은 맥락이라고 이해해도 되는지.
“알게 모르게 불교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불교는 가장 세련된 사상체계라고 생각한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그런 면에서 복이다. 어릴 때부터 불교를 많이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뜰 앞에 잣나무’ 같은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어릴 때는 몰랐는데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오직 할뿐’이라는 말도 그렇다. ‘개처럼 산다’는 말에도 그런 영향이 들어있다. 불교에서 긍정적인 양분을 많이 받았다. 나이가 들어서 보니 인생이 별로 특별하지 않더라. 그렇다면 어떻게 지혜롭게 살 것인지가 문제인데 매순간 풍요롭게 존재해야 한다. ‘개처럼 산다’는 말은 그런 의미다. 내 머리 속에서만 나온 말은 아니다. 알게 모르게 ‘할뿐’이라는 말이나 ‘뜰 앞의 잣나무’ 같은 불교적인 사유와 카뮈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이 섞여 나온 것이다. 어떤 생각들은 갈수록 단단해지는 경우가 있다. ‘할뿐’이라는 선어(禪語)가 딱 그렇다.”

 

▲책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 말했다. 선생님이 생각하는 돈점은 무엇인가.
“나는 종교인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수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인문학을 이야기하고 있느냐. 나의 인문학은 생활이다. 돈오점수를 생활 속에서 이해하고 있다. 어떤 강의를 들으면 이제 알겠다. 이제 됐다. 세상을 좀 이해할 것도 같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 무언가 좀 변해야 하는데 일주일이 지나서 보면 전혀 달라져 있지 않다. 어떤 시를 읽고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예전으로 돌아가 있다. 그래서 느낀 것이 깨닫기는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잊히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돈오는 했는데, 변화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점수가 안 된 것이다. 대학 시절, 지금은 작고하신 김충렬 교수님으로부터 ‘장자’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강의를 듣는 도중에 시커먼 도화지로 된 방에 구멍이 뻥 뚫리면서 빛이 확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어느 순간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의 경험을 나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어떤 50분은 10권의 책보다 세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니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느낀 것이 아! 한 번의 깨달음은 있었는데 자꾸 일상으로 회귀가 되는 구나. 그래서 그 깨달음이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갈고 닦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돈오점수라고 한 것이다. 불교적인 깨달음이라고 할 수는 없고 생활 속에서 느끼는 작은 깨달음들을 불교적인 용어로 표현한 것뿐이다.”

 

▲불교는 태생적으로 인문적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중생의 고통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모습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권위적이고 기복적이고, 한편으로는 군림하려 한다는 비판도 있다.
“스님들이 받는 특혜가 있다. 사회적인 기대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중을 받는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님들 스스로 자경심(自警心)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불교만은 아니다. 모든 종교가 그런 측면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불교를 좋아한다. 그러나 옳은 불교를 좋아한다. 옳지 않은 불교는 배격한다. 좋아하지 않은 종교의 가르침이라도 바른 이야기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출가를 했으니 끊임없이 수행을 해야 하고, 그래서 존경받는 큰 스님이 돼야 한다. 존경은 강요로는 불가능하다. 우러나와야 한다. 스님들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지혜로웠으면 좋겠다.

 

▲불교 관련 책 중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는지.
“주변만 찝쩍거려서 화엄경(華嚴經)이든 법화경(法華經)이든 금강경(金剛經)이든 제대로 읽어보지를 못했다. 최근 읽은 책 중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한영조 교수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감명깊게 읽었다. 프라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도 좋았다. 불서(佛書)라고만 볼 수는 없지만 선불교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줬다. 불교 관련 책들은 읽으면 항상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다.”

 

▲불교의 가장 큰 매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또 어떤 불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불교의 매력은 쿨(Cool))한데 있다. 명료하고 담박하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내용은 너무 거창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모르겠다. 그런데 불교의 가르침은 이해하기 쉽고 아름답다. 그리고 말이 된다. 사람이든 중생이든 누구나 꽃이고, 그 꽃마다 다 자기 길이 있다. 마음마다 불성이 있는데 그 불성을 우리의 아집(我執)과 반연(攀緣)들이 덮고 있다. 그래서 반야(般若)를 통해 이를 닦아내면 결국 부처가 될 수 있다. 이 모든 말들이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불교의 최종목표는 멸(滅)이다. 영생(永生)이나 환생(還生)이 아니다. 감동적이다. 정말 지혜롭다는 생각이다. 가끔 신문지면에 나오는 좋지 않은 불교소식을 접하면 마음이 아프다. 불교도 결국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성(城)’ 같은 (부조리한 질서 속에) 조계종이 들어가 있다. 그 성을 없애야 하는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 같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그 속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자정 노력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불교만이라도 속세의 시스템이나 이기심이 덜 작동하는 그런 곳으로 남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법보신문 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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