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 덴만구산사에서 합격 소원을 적은 학생들
시험의 신 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죽은뒤 시신을 끌던 소의 상
덴만구산사의 전경
해인사에 있는 선불장 현판
과거장(科擧場)과 선불장(選佛場)! 어디로 갈 것인가?
꼭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작년(2013) 가을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험의 신’을 모셔놓은 큐슈(九州)에 위치한 텐만구(天滿宮)을 참배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일년에 수백만 명이 찾는다는 가장 유명한 시험기도 전문 신사(神社)이다.
경내 뜨락에 설치된 긴 탁자 양쪽에는 귀밑에 솜털이 보송뽀송한 소년과 소녀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소원지에 합격 내지는 원하는 점수를 얻게 해달라는 기도문을 또박또박 한 자씩 정성을 다해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 광경이 안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대견해 보인다. 저 나이 때 시험을 앞둘 무렵이면 늘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심할 때는 설사까지 했다. 그럼에도 저 아이들처럼 기도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시험스트레스 때문에 ‘실력보다 늘 점수가 덜 나왔다’며 투덜거렸던 기억만 새록새록 일어난다.
본전(本殿)앞에 있는 매화(飛梅)만큼 유명세릍 타고 있는 청동으로 만든 소가 앉은 자세로 입구를 지키고 있다. ‘시험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845~903)가 죽자 그 시신을 끌던 소가 이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그를 여기에 묻었고 그 위에 신전이 지어지면서 비로소 신사(神社)의 역사는 시작된다. ‘영험있는 소’를 만지고 문지르면 무난히 합격한다는 전설이 함께 전해져 온다. 이미 사람들의 손길을 탈대로 탄 뿔과 코 부분은 유독 반질거렸다. 사람들이 자리가를 비우는 틈을 이용하여 나 역시 코와 뿔을 잡고서 한참동안 어루만졌다.
출가자에게도 시험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승가고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시는 고시인데 관리를 뽑는 과거(科擧)가 아니라‘붓다후보’를 뽑는 과거장 즉 선불장(選佛場)인 것이다. 선불장이란 말은 중국 당나라 시대의 마조(馬祖 709~788)선사로 부터 유래했다. 스님은 당시 과거장으로 가던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선불장으로 향하도록 만든 일등공신이다.
과거에 합격하여 출세하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자기수행을 통해 인류의 정신적 스승이 되는 것도 그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주변에 널리 설파한 까닭이다. 그것이 주효했던지 언제부턴가 젊은이들은 과거장이 아니라 선불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때는 관리를 뽑는 장소보다는 부처를 뽑는 장소가 더 인기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당시의 부패한 과거제도도 선불장 융성에 한 몫을 했다. 시험을 치더라도 그것은 형식일 뿐 합격자는 이미 내정된 까닭이었다.
좌절한 과거 지망생들은 과감하게 발길을 돌렸다. 청년 수재(秀才)와 방온(龐蘊)은 함께 과거길에 올랐던 절친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주막에서 만난 이름없는 스님의 선불장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아 그 자리에서 마음을 돌려먹고 마조선사의 문하로 목적지를 바꾸었다. 얼마나 영리했든지 이름조차 ‘수재’였던 그 청년은 뒷날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이라는 유명한 선사(禪師)가 되었고, 방거사(龐居士)로 불리는 방온 역시 재가의 대표적인 수행자로써 오늘까지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당나라의 선불장은 조선시대에는 승과평(僧科坪)으로 불리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승과평이란 지명이 남아있는 곳은 강남 봉은사 앞 코엑스 자리와 봉선사 입구 과수원 자리(현재는 공원)이다. 조선개국 이후 없어진 승과고시를 조선명종 6년(1551)에 부활시킨 조선불교 중흥의 성지인 것이다. 이 시험에서 발굴된 대표적인 인재가 서산(1520~1604)과 사명(1544~1610)대사이다. 문정왕후(1501~1565)는 허응당 보우(普雨1509~1565)대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실시했던 승가고시가 임진란의 구국영웅을 발탁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하여 승가의 인재인 동시에 국가의 인재가 된 것이다. 현재 봉은사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에는‘선불당(選佛堂)’이란 편액이 걸려 있고, 해인사 궁현당 역시 ‘선불장’현판을 달고 있다. 모두가 선불장의 역사를 오늘까지 말없이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는 수십번 시험에 떨어진 전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십년 이상 계속된 낙방 스트레스로 인하여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살아도 사는게 아니였다. 남들은 빠르면 10대 후반, 늦어도 20대가 되면 벼슬길에 올랐는데, 30대가 되어도 계속 학생신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고시폐인’이었다. 이제 “마지막 응시”라고 생각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과거길에 올랐다.
해가 저물어 발걸음을 멈추었고 인근의 안성 칠장사(七長寺)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탄하다말고 문득 마음에 섬광처럼 짚히는 것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종교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괴나리 봇짐 속에 든 간식거리인 유과(油果:쌀과자)를 꺼내 법당에 공양물로 올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지극정성 기도를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날 밤 꿈에 선신(善神)이 나타나 과거답안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시험제목은 ‘해질 무렵(낙조落照)’이었다. 그런데 6줄은 가르쳐주면서 마지막 두 줄은 생략하고 사라지는 것이였다. 왜냐하면 새벽 닭이 울었기 때문이다. 잠을 깬 후 합격걱정 보다는 시험제목의 일치여부가 더 궁금해졌다.
아니냐 다를까 이후 모든 것은 꿈 그대로 였다. 마지막 두 줄은 그동안 닦아놓은 자기실력으로 해결했다. 뒷날 사람들은 이를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라고 이름 붙였다. 시험합격도 개인의 인생사에서 참으로 영광스런 일이지만, 이후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조선사회를 맑히는 일에 일조를 더한 것은 더욱 의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시험이란 개인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사회를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고 하지 않았던가? 인재를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래서 시험이란 모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불편한 것이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절대로 없어질 수 없는 필요악(?)이 된 것이다. 결국 시험을 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말이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입시를 마쳤다고 하더라도 결코 시험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작게는 운전면허 시험부터 각종 자격시험, 크게는 입사시험 승진시험 심지어 노인대학 시험까지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우리네 인생사다. 더 이상 시험칠 일이 없다는 것은 알고보면 ‘완전한 퇴물(?)’이 됐다는 말과 동일하다. 따라서 시험칠 일이 있다는 그 자체가 나의 존재감을 확인케 하는 증거인 것이다.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시험도 다양화되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길을 따라가는 교과서적 삶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자기 길은 자기가 만들어 갈 수 있다면 그건 더 좋은 일이다.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는 것은 그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또다른 희열을 만들어 준다. 잘 닦여있는 출세를 위한 시험장의 탄탄대로를 가는 것도 물론 좋은 일이지만 산길처럼 울퉁불퉁한 선불장 길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도 역시 아름다운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다. ‘싱글’이 문화현상이 된 시대에 또 하나의 대안적 삶의 방식으로서 출가(出家)세계에 대한 관심을 가져본다면 이 또한 괜찮은 일 아니겠는가?
원철스님 해인사 문수암암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