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레알청춘일기 - 배선영]
어릴 때, 엄마가 집을 나간 적이 있다. 큰 가방을 들고 울면서 뛰쳐나가는 엄마를 나 또한 울면서 쫓아갔었다. 내가 정류장까지 다다르기 전에 엄마는 버스를 타고 가버렸다. 집으로 돌아와서 문 쪽으로 돌아앉아 한참을 울었다. 할머니는 내 뒤에서 뭐라고 크게 소리치시고는, 날 내버려 두셨다. 서럽게 울면서 저 멀리 노을이 지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떠나는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에 비해 돌아온 날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그리고 엄마가 다시 집을 나갈까봐 조마조마해 하며 눈치를 보았다. ‘그때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행복하지 않았을까’, ‘나 때문에 엄마가 불행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들은 오래도록 내 안을 떠나지 않았다. 내 삶이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애씀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중에서
어떤 경험들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경험과 기억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아 억울하기까지 하다. 어째서 과거는 나를 이렇게 꽁꽁 싸매고 오랜 시간동안 옭아매는 것일까. 왜 나는 30년 가까이 지난 일을 떠올리며,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지고 코끝이 찡해질까. 과거는 과거로 끝나면 좋으련만, 다른 관계에 영향을 미치면서 나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일까.
일에 문제가 생겼다.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말이 떨어졌고, 시간에 쫓기며 정신없이 문제를 마무리했다. 일하던 중간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그 일 이후 일터에서, 나는 매일같이 무너져 내렸다. 지친 몸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을 안고 직장을 나왔다.
지난 일터에서의 경험들은 나를 일과 조직에 대해 온몸과 마음으로 거부하게 만들었다. 일을 제안 받거나 업무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머리에 쥐가 날 것처럼 저려온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지혜로워지고 단단해진다고들 하는데, 나는 왜 나이가 들수록 더욱 두렵고 불안해지는 것일까. 차라리 몰랐을 때가 더 용감했다. 일을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나서는 힘든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현명함이 생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을 사리고 있다.
한때 열정과 희망에 열렬히 매달렸던 적이 있었다.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내가 기대한 결과나 반응을 보지 못해 실망하고 허무해하던 경험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열정, 희망 유의 단어들은 가장 싫어하는 말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요즘 열심히 하는 게 싫고, 애쓰며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애쓰지 않고 적당하게 살면 정말 좋을까? 과연 ‘적당하게’라는 것이 가능은 할까? 상처받더라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서 부러웠다. 그리고 쓸쓸했다.
내가 나약하고 불안한 인간이라는 것이, 지난 경험이 내게 알려주는 전부가 아니면 좋겠다. 나는 종종 용기를 내고 싶고, 열정을 드러내고 싶고, 내 안의 꿈틀거리는 무엇인가를 표출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보려는 순간 온몸으로 두려움과 긴장감이 밀려오면서 움츠러들지, 아니면 용기를 내어볼지 갈등에 빠진다. 지금까지는 숨죽이고 있는 쪽을 주로 선택했다.
2014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결심한 것들이 있다.
용기를 낼 것.
쉽게 절망하지 말 것.
유연해질 것.
잘한다, 못한다는 평가에서 벗어나 원하는 것을 실컷 할 것.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몸을 움직일 것.
(물론 인생 최대의 난제인 영어 공부에 대한 결심도 있다.)
나에게 다가오는 일들에 대해서 늘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어보고 싶다. 이제는 조금씩 열정과 희망 같은 것들의 힘을 내 안에서 되살리고 싶다. 좀 더 융통성 있고 유연한 내가 되어 세상을 받아들이고 싶다.
어떤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자유로워지고,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던 기억에 대해 쿨해지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지난 경험 때문에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불안하게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용감해지고 싶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나를 달래주고, 기대하고 희망을 가져도 좋다는 마음을 가져보고 싶다.
생각해보면 엄마가 돌아온 것처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좋았던 경험들도 많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행복하고 설렜던 일들보다는 힘들고 괴로웠던 일이 더욱더 강력하게 달라붙어 있다. 좋았던 추억들을 되살리고 그때의 행복감과 즐거움을 다시 느껴보려고 애쓰는 것도 2014년의 결심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새해 목표는 3일만 노력하면 되는 것으로 정해야 하는데, 너무 거창한 것들을 결심해서 과연 올해 안에 이룰 수 있을까 염려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결심들을 올해 안에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이것들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이미 있는 에너지들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내가 원한다는 것을 알면 언젠가는 발현될 것이라는 것을 지난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투적이지만 긍정적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부정적이고 세상에 대한 불평불만을 한가득 안고 있는 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년은 끝없이 희망하고 기대하고 애정을 담아 세상을 대하는 한 해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배선영 (다리아)
대책 없지만, 하루하루를 재미있게 살고 있는 백수
*이 글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