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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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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jpg

어린 시절 아픔과 상처를 남김 없이 소설로 고백한 소설가 박완서.  사진 <한겨레> 자료

 

 

한국전쟁 피난민 행렬-.jpg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 행렬.  사진 <한겨레> 자료

 

 

현저동 무악동 2001년도 풍경-.jpg 

박완서가 7살 때 개성 박적골 고향을 떠나 올라와 살며

싱아를 찾아 헤맸던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의 2001년 모습

사진 <한겨레> 자료.

 

 

<조현의 통통통>

 

설 쇠러 가는 고향은 아름다운 추억만 있는 게 아니다. 고향집은 중풍으로 누운 할아버지의 마른기침 소리와 홀로된 어미가 토끼 같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쉬는 한숨소리, 과자 한 봉지를 놓고 동생과 다투다 엄마에게 맞은 회초리 자국이 남아 있는 곳이다. 귀향 차엔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이 동승하고 있다.


 소설가 박완서(1931~2011)가 ‘소설로 그린 자화상·유년의 기억’이란 부제를 붙여 낸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더 깊은 상처들이 맨살을 드러낸다.


 ‘시골(개성)에서 농사짓던 큰 숙부가 면서기가 되고 오빠는 총독부에 취직했다. 큰 숙부는 징용이나 보국대를 뽑는 노무부장을 해 일본의 패망 날 박적골(개성) 시골집은 청년들의 분풀이 대상이 됐다. 일본제철회사로 옮긴 오빠는 이상주의적인 얼치기 빨갱이였다가 조직으로부터 멀어졌다. 전쟁이 터져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자 오빠가 전향했어도 정상을 참작해 주겠지 하는, 치사한 생각을 난 하고 있었다.’


 박완서는 “그때 나는 정말로 더럽고 치사했다”고 고백할 만큼 좌든 우든 벌레처럼 기어서 어디 붙어서라도 살아야 했다고 한다. 그러나 6·25는 그가 세살 때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돌봐주던 숙부와 유일한 형제인 오빠를 앗아갔다.


 1970년대 한국정신치료학회를 창립한 이동식 선생에 따르면 정신의학에서 사람에겐 일거수일투족을 지배하는 불건강한 감정이 있다. 이런 ‘핵심감정’이자 노이로제로부터 해방되느냐 여부가 정신건강을 좌우한다고 한다.


 노이로제와 상처를 고백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상처의 파도에서 벗어나 바다의 품으로 돌아간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상처는 고백과 참회로 방생이 되었을 때 비로소 짠 바다에서 씻기고 아물어져 과거의 추억이 된다. 자기의 슬픈 가족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예 역사 교과서마저 뒤바꾸려 하거나, 사상적 피해망상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미제 앞잡이’나 ‘민족 반역자’니 ‘빨갱이’나 ‘종북론자’니 하는 낙인을 찍으며, 상처투성이 분노를 상대에게 투사하는 한에선 불가능한 꿈이다.


 스무살 처녀 박완서의 생리가 멎어버릴 정도의 깊은 내상을 안겨준 ‘사상 공세’는 지난 60년간 한민족의 핵심적인 노이로제다. 전후 두 세대가 지난 오늘날까지 국민 다수의 노이로제가 물레방아 돌듯 돌고 있다. 그것도 국가 지도자들에 의해서다. 그러면서 국민건강과 국민행복시대와 통일 시대를 기대할 수는 없다.


 지난 22일이 박완서가 세상을 떠난 3주기였다. 박완서의 고향에 지천이던 싱아는 발그스름한 줄기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한 풀이다. 소녀 박완서가 마치 상처 난 몸에 붙일 약초를 찾는 짐승처럼 조급하고도 간절하게 인왕산 속을 헤맸지만 한 포기도 찾지 못했다는 고향의 풀이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줄 알고, 속살을 내보이며 참회할 줄 알았기에 싱그러웠던 얼굴들이 그립다. 이번 설엔 서로에게 그렇게 새콤달콤한 싱아가 되어줄 일이다. 아, 맑은 침이 고인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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