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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리운 홍성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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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울린 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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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자유의 삶을 살다가 죽음 앞에서도 초연했던 홍성훈 선생님.  사진 이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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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박영대 <행복공장> 이사

 

 

28일은 인천지역 정형외과 의사였던 홍성훈 선생님의 2주기다. 두해 전 겨울, 홍 선생님 부부와 소백산 자락의 사과농장을 찾았다. 선생님은 대상포진이 재발한 것 같다며 불편해했다. 며칠 뒤 전화를 했다. “영대야, 나 암 말기란다. 내가 돌팔이라는 걸 다시 한번 여실히 증명한 거지.”


 그를 처음 만난 건 천주교 청년단체에서 활동하던 1980년대 중반이었다. 정형외과 병원인데도 큰 수입원인 산업재해와 교통사고 환자 진료에 꼭 필요한 입원시설이 아예 없었다. 양심상 환자 유치를 위해 영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병원 단골은 노인들이었다. 그는 노인들의 끝없는 하소연을 정성껏 들어주었다. 그래도 환자가 많지 않은 탓에 낡은 녹음기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을 때가 많았다.


 이렇게 환자가 별로 많지 않아도 투명한 세무 신고로 개인병원 가운데 가장 세금을 많이 냈다. 하지만 선생님은 골프채를 손에 잡아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환경단체 대표까지 맡아 골프장 건설 반대에 앞장섰다. 선생님의 취미는 등산, 여행, 판소리였다. 틈만 나면 산에 오르고 여행을 떠났고, 한주에 한번 인천지역 지인들과 판소리를 배웠다. 아직도 네팔의 안나푸르나를 오르며 목청껏 판소리를 하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번호표 기기를 설치해야 할 정도로 환자가 많아졌을 때도 한달에 절반은 동료 의사에게 병원을 맡기고 훌쩍 여행을 떠났다.


 선생님 부부는 죽을병이 걸리더라도 억지로 살리려고 애쓰지 않기로 서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 말씀 그대로 선생님은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당신 집에서 돌아가셨다. 부고를 듣고 달려가 환히 웃고 있는 선생님의 영정을 대하니 눈물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그만큼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고 어른이었다. 지난가을, 홍 선생님과 두번 다녀온 네팔의 안나푸르나에 오르며 몇 자 적어보았다.


 ‘선생님과 올랐던 안나푸르나 산길을 홀로 올랐어요/ 산을 높이 오를수록 당신께 대한 그리움이 깊어져 눈물났습니다// 오늘 아침 하얀 눈 덮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박영석 추모비 옆 바위에 오색 기도 깃발 룽따를 걸고/ 당신 좋아하시던 쇠주 한 잔 가득 붓고 큰절 올렸습니다/ 안주도 없는 깡소주 달게 드셨는지요?// 죽음 앞에서도 자유인이셨던 선생님/ 당신 영혼의 한 자락 깃든 여신의 땅에는/ 당신만큼 자유로운 영혼이 밤하늘 별만큼 많을 테니/ 술동무 얘기동무 많아 참 좋으시겠어요/ 그런데도 당신 그리운 마음에 당신께 꾸중 들을 괜한 짓을 했습니다// 보고 싶어요, 눈보다 더 환한 선생님 웃음이’ 

 박영대 행복공장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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