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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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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바닥으로 내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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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처럼 당신도 진흙투성이의 저 바닥으로 내려가세요

 


  기탄잘리 11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찬미와 노래와 기도를 내버려 두세요!
  문마저 모두 닫힌 이 사원의 외롭고 어두운 구석에서, 당신은 누구를 예배하는 것입니까? 당신의 신은 당신 앞에는 없다는 것을, 눈을 뜨고 보세요!
  신께서는 농부가 팍팍한 땅을 가는 곳과 길 닦는 사람들이 돌을 깨는 곳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의 옷은 먼지로 뒤덮여 있지요. 당신의 신성한 망토를 벗어버리고 신처럼 당신도 먼지투성이의 저 흙으로 내려가세요.
  구원이라고요? 이 구원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주(主)는 창조의 속박을 스스로 기꺼이 떠맡고 계십니다. 신은 영원히 우리 모두와 인연을 맺고 계십니다.
  당신의 명상에서 뛰쳐나와 꽃과 향수를 멀리하세요. 당신의 옷이 해어지고 더러워진들 무슨 거리낌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이마에 흐르는 땀과 노역 속에 신을 만나 그 곁에 서십시오.
 


예수flickersmoregoodfoundation.jpg


유쾌한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로 잘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어릴 적 이야기입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습니다. 당시 작가는 그리스의 작은 섬 크레타에 살았는데, 터키의 침략을 받아 그가 살던 작은 마을에도 잔인한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그의 아버지는 겨우 여덟 살배기 아들 카잔차키스의 손을 잡아끌고 학살의 현장으로 데리고 갔지요. 커다란 대추야자나무가 있는 광장에 도착한 그의 아버지는 소년에게 ‘자, 똑똑히 봐라!’고 소리치며 그 끔찍한 장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습니다. 세 사람의 그리스인 사내들이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는 대추야자나무를.
  “죽을 때까지 목이 매달린 이 사람들을 절대로 네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된다. 알겠지?”
아버지가 소리치자, 소년은 두려움으로 벌벌 떨며 물었지요.
  “누가 그들을 죽였나요?”
  “자유가 죽였어!”  

소년의 아버지는 대추야자나무에 가까이 다가가서 거기 매달린 시체에 키스까지 하도록 윽박지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차마 거역하지 못한 소년은 시체의 발에 입을 맞추었지요. 소년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아버지를 따라 집으로 돌아오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가 소년을 끌어안으며 물었어요.
  “도대체 어딜 갔었니?”
소년이 울먹이며 말을 못하자 그의 아버지가 대신 답변했습니다.
  “예배를 드리러 갔었소.”


이 이야기는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자서전> 속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자식을 훈육하는 방식치고는 참으로 과격한 방식이지요. 저절로 헉! 소리가 튀어나올 지경입니다. 소설가의 아버지는 사람들이 생각해 온 예배와 신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전복시켜버립니다. 억울하게 죽은 네 동족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죽은 그들의 발에 입 맞추는 것이 곧 ‘예배’라고! 어쩌면 이런 놀라운 발상의 능력을 가진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기에 카잔차키스는 그토록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나는 이 이야기를 읽은 후 소위 예배에 대한 고정관념이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신에 대한 틀에 박힌 인식도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너나없이 많은 종교인들이 엿새 동안은 자기 욕망의 부추김을 따라 세속적으로 살다가 ‘거룩한 날’, ‘거룩한 장소’를 찾아가 불안한 영혼을 달래고 자기를 괴롭히는 죄의식을 덜어내는 일을 반복하지요. 그리하여 그것이 하나의 타성으로 고착되면 그런 종교적 행위가 곧 신을 모신 성스러운 삶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피를 끓게 하는 생생한 삶의 문제는 도외시한 채! 
삶을 공들여 만지는 예민한 촉수를 지닌 시인은 이런 나이브한 우리의 낡은 관념에 메스를 들이댑니다. 
   
찬미와 노래와 기도를 내버려 두세요!/문마저 모두 닫힌 이 사원의 외롭고 어두운 구석에서, 당신은 누구를 예배하는 것입니까? 당신의 신은 당신 앞에는 없다는 것을, 눈을 뜨고 보세요!


아마도 거룩한 때와 거룩한 장소를 찾아 신을 경배해온 이들은 시인의 이런 표현에 벌컥,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시인은 구체적인 삶의 현실을 내평개친 채 성소를 찾고 성물을 숭배하는 행위에 대해 ‘눈을 뜨고 보라!’며 질타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신성시하는 공간의 사물은 훼손되지 않을 만큼 신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성한 것을 존속시키고 신의 현존을 영속화하기 위해 사람들은 신상(神像)들을 제작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신, 감금된 신은 ‘인간의 그림자’일 뿐이지요(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시인 타고르가 자기 시집에 붙인 제목 ‘기탄잘리’는 벵골어로 ‘신께 바치는 노래’란 뜻이라지요. 그토록 시인은 신을 사랑했지만 특정한 공간에 신을 가두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신이 특정한 장소에 매이게 되고, 성스러움이 공간의 사물과 연속된 속성에 매이게 되면, 우리의 삶은 그 순간부터 망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크고 화려한 외양을 뽐내는 교회나 사원들을 보세요. 썩은 과일처럼 부패한 냄새를 풍기고 하나같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사원을 떠나 저 진흙투성이 삶의 바닥으로 내려가라고 권고합니다. 
 
신께서는 농부가 팍팍한 땅을 가는 곳과 길 닦는 사람들이 돌을 깨는 곳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의 옷은 먼지로 뒤덮여 있지요. 당신의 신성한 망토를 벗어버리고 신처럼 당신도 진흙투성이의 저 바닥으로 내려가세요.

타고르의 대선배 뻘인 시인 카비르도 특정한 공간에 예속되지 말고 오히려 거룩한 순간을 마주하라고 노래하지요 “오, 벗이여, 그대는 어디에서 나를 찾아 헤매는가?/이보게, 나는 그대 곁에 있네./나는 성전이나 사원에도 없고,/나는 그대들이 찾는 장엄한 신전이나 거룩한 산에도 없네……만일 그대가 진실한 구도자라면,/지금 나를  볼 수 있을 텐데,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그렇습니다. 팍팍한 땅을 경작하는 농부든, 길을 만들기 위해 돌을 깨는 석공이든, 카비르처럼 천을 짜는 직물공이든, 지금 이 순간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땀 흘려 일하는 삶의 자리에서 신의 숨결을 마주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자신이 선물로 누리는 생의 시간을 성화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예수4.jpg


예수 역시 제자들과 더불어 시간이 성화되는 황홀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였는데, 예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그가 걸친 남루한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죽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런 광경을 목도한 제자들은 얼마나 놀랍고 황홀했을까요. 베드로가 상기된 목소리로 입을 열죠.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세 분을 모시도록 하겠어요.’ 그런데 갑자기 구름 속에서 신비로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이런 기이한 체험을 한 뒤, 예수는 그곳을 떠나기 싫어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와 질병과 부자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삶의 바닥으로 다시 내려갔지요.
 

그러니까 예수는 그 황홀한 내적 명상이나 신비체험 속에도 빠져 살지 않았고 시인의 적절한 표현처럼 ‘창조의 속박을 스스로 기꺼이 떠맡’고 살았던 겁니다. 시인 타고르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지만, 바로 이런 대목에서 시차를 뛰어넘어,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어  예수가 보여주는 삶의 진실과 깊이 만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여간 시인은 우리가 자기만족의 명상에 도취하고 혼자만의 즐거움에 빠지는 건 신의 자비로운 본성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자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그런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시인 역시 거기에서 자유로워 보이지 않네요. 인간의 삶은 여러 겹의 무늬를 내장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여기 님의 발판이 있는데, 거기 가장 가난하고 비천하고 길 잃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님은 발은 머물러 있습니다.
  님에게 경배를 올리고 싶사오나, 저의 예배는 가장 가난하고 비천하고 길 잃은 사람들 속에 발을 쉬고 계신 그 깊은 곳에는 닿을 수가 없습니다.
                                    ―<기탄잘리․ 10> 부분


먼지투성이 바닥으로 내려가라고, 그것이 진정한 예배라고 말하던 시인은 님의 발이 머물러 있는 그 ‘깊은 곳’에는 내려갈 수 없다고, 솔직한 속내를 고백합니다. 본래 인간 내면의 결은 이토록 여리고 나약한 것일까요. 하지만 성스러움에 뿌리내린 그 중심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닥에 있는 이들에 섞여 ‘발을 쉬고 계신’ 님의 자비의 숨결을, 시인은 뜀뛰는 가슴으로 느끼고 있으니까요. 비록 소년 카잔차키스처럼 두려움과 고통을 무릅쓰고 시신의 발에 입 맞추진 못할지라도. 영원히 푸른 청년 예수처럼 지치고 구멍 난 삶의 아픔이 있는 바닥으론 내려가지 못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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