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한국사회] 또 하나의 약속
아버지는 딸의 죽음 앞에서 다짐한다. 거대한 기업의 횡포 앞에서 죽음의 원인조차 밝히지 못하고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현실에 누군들 분노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분노는 쉬울 수 있지만 약속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것도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와 마주해서 그 약속을 지키는 일은 절망적이기조차 하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스물셋 청춘을 짓밟은 자들에 대한 분노를 넘어, 강자 앞에서 굴복하고 마는 시대에 대한 일격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패배주의를 이겨내는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는가를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그 모든 암울하고 감당키 어려운 위압적 현실과 어떻게 마주설 것인가를 <또 하나의 약속>은 깊고 깊게 일깨우고 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고 주변의 조력자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거대한 자본의 권력을 이길 수 있는가? 그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러나 딸의 아버지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다. 숱한 고비와 좌절의 구렁텅이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기 앞에서 눈을 감은 딸에게 약속한 그 순간이 그를 지탱하게 한다. 그건 그 딸만이 아니라 이 땅 도처에서 힘이 없어 억울하게 당하고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우리의 각성이기도 하다.
그런데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언제 그랬더냐는 자들이 있다. 경제민주화니 노인복지니 반값 등록금이니 뭐니 하던 약속은 모두 정치적 사기가 되고 말았다. 애초부터 그런 말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군다. 이들에게 약속은 그야말로 깨기 위해 존재하는 모양이다. 약속 하나는 확실하게 지킨다는 권력자는 취임 1년이 지난 시간 동안 무수한 약속을 해명 하나 없이 본래 없던 일로 만들어왔다. 2월25일은 또 다른 누군가의 딸이 바로 그 약속으로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날이다.
영화의 <또 하나의 약속>과는 달리, 이 딸은 그녀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약속한 것일까? 내걸기는 양의 머리요, 파는 것은 개고기라는 말의 사자성어는 양두구육이다. 아버지에게 한 약속과 국민에게 하는 약속은 이런 것이었던 걸까? 아니라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 이렇지는 않지 않겠는가?
그런데 말이다. 그녀가 또다시 약속을 하기 시작했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인가 뭔가라는 약속 말이다. 이미 한번 속았는데, 이번에는 믿어도 되는 건가? 한번 깬 약속에 대한 변명 하나 없는 이가 하는 또 다른 약속은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을까? 저울에 달아보면 어떻게 나올까?
중국 대사관을 통한 중국 정부의 공식통보가 위조라는데 진상규명이 먼저란다. 그렇다면 그 진상규명의 출발점은 위조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 경과는 어떻게 된 것인지로 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중국 정부의 공식 통보를 문제 삼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간첩 조작을 위한 증거 위조라는 현실에 대해 검찰과 여당의 대응은 그야말로 후안무치다. 대통령 선거에서 했던 대국민 약속도 아무런 죄송함 없이 깨버리는 권력자가 있는 나라에서는 아마도 당연한 풍경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또 하나의 약속”을 고통스럽게 해야 하는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 약속을 깬 뒤, 또 깨질 것 같은 “또 하나의 약속”을 지겹게 듣는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면 머리를 숙이고 송구스럽다고 하고,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으면서 약속을 또 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게 거듭되면, 우리는 저 뼈저리게 아팠던 아버지가 딸에게 다짐한 <또 하나의 약속>을 끝까지 밀어붙일지도 모른다. 약속한다. 정말로.
한종호 꽃자리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