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창] 봄날, 매화에 대한 여러 생각
법인 스님
따뜻한 봄볕이 내리쬔 27일 오후 홍매화가 붉게 핀 전남 광양시 진상면 내금마을 금이리 들판에서 농부가 농사 준비를 하고 있다.
광양/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땅끝마을의 봄소식은 초록 풀빛에 앞서 대흥사 천불전 담장 곁의 청매화 한 가지에 먼저 찾아왔다. 모진 한겨울을 견디고 망울을 터뜨려 환하게 피어난 꽃을 보노라니 그저 반갑고 고맙다. 꽃은 그 모습과 향기만으로도 보는 이에게 기쁨이 된다. 사람도 이와 같아야 하리라. 꽃 앞에 서면 수행자는 삶의 향기로 말해야 한다는 옛 스님의 말씀이 거듭 절실하게 다가온다.
수행은 늘 깨어 있는 삶을 사는 일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늘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을 높이며 끊임없이 성숙시키는 것이다. 성찰은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살피는 것이다. 사색은 사물과 일에서 참되고 깊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그래서 한세상 의미있고 감동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종교적 울타리를 초월하여 누구라도 수행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늘 깨어 있는 노력이 없이 타율적 의무와 습관의 노예가 되어 살아간다면 인생의 생기와 향기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멈출 줄 모르는 속도와 낮출 줄 모르는 성장에 갇혀 ‘정신없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런 때야말로 수행과 혁명이 필요하다. 수행은 모든 생명이 함께하는 길 위에서 자신이 가진 고유한 개성과 가치를 꽃피우는 나만의 길이다. 진달래, 개나리, 장미, 호박꽃, 매화는 제각기 그들만의 이름과 향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꽃들의 향기를 탐하지 않는다. 참으로 오묘한 어울림이며 화음이 아닌가?
수행은 또 자신의 이름과 향기를 간직하고 뿜어내는 일이다. 이름과 향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바로 ‘지조’라고 이를 수 있다. 올곧게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지켜내는 사람을 지사라고 한다. 그래서 옛사람은 대나무와 매화 등 사군자에서 지사의 풍모를 찾았고, 뜰 앞에 그것들을 심어두고 보면서 자신을 성찰하고자 했다.
매화를 노래한 시 중에서 나는 조선시대 신흠의 시를 좋아한다. “매화는 평생을 추위에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구절에서 이 땅의 숱한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의 혹독한 인고의 세월을 생각한다. “풍란화 매운 향기 님에게 견줄쏜가/ 이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가 이 위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 위당 정인보가 만해 한용운의 지사적 삶을 풍란화에 비유하여 지은 추모시다. 매운 향기라니, 그렇다. 일제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곤궁과 고독의 시대를 당당하게 살아간 만해의 모습은 칼날 위에 부는 훈풍이고 얼음 위에 핀 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향기를 파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이 땅의 지식인과 정치인, 노동운동가 등 이른바 사회지도자들이 평소의 가치와 신념을 저버리고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정반대의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 역사는 지조를 버린 이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간혹 서울 나들이를 갔다가 보게 되는 종합편성채널에는 변절자들의 해괴하고 교묘한 논리가 판을 친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넘어 한없이 서글픈 생각까지 든다. 조용히 생각해본다. 왜 변했을까? 방법은 바꿀 수 있어도 길은 바꾸면 안 되는 것인데, 왜 자신이 평소 걸어오던 길을 바꾸었을까? 결코 놓을 수 없는 권한 행사, 더 풍족한 경제생활, 아니면 그보다는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조를 버린 그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 그들은 믿음이라는 이름과 존경이라는 향기를 잃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 변절자의 초라한 모습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매화는 그윽한 향기로 찾아왔다. 봄의 초입, 잠시 매화나무 앞에 서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