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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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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의 통통통

이순신 장군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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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실종자 가족들. 박종식 기자

 

십자가의 고난 뒤엔 부활의 기쁨이 있다. 그러나 부활절(20일)에도 주검만이 가득했다. 세월호의 어린 승객들에게 구명조끼를 챙겨주고 자신은 가장 나중에 구명조끼를 입겠다던 박지영씨를 비롯한 승무원들과 학생들을 먼저 챙기던 남윤철 교사 등이었다. 너무 두려워 바다로 뛰어내리지 못하는 친구에게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입혀준 정차웅군도 있었다. 이타적 삶으로 거듭난 ‘살신성인’들이었다.


그럼에도 부활 찬양을 부르기 어려웠다. ‘전원 생환한 선박직 직원 15명이 제정신을 차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아이들을 먼저 피신시켰더라면’, ‘사고 직후 정부·군·경이 신속히 실제적 구조에 나섰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탄식이 ‘부활’을 압도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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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한 세월호. 김봉규 기자


세월호가 침몰된 곳에서 멀지 않은 진도의 울돌목은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맞서 명량해전을 벌인 곳이다. 이순신의 탄신일(4월28일)을 앞두고 이순신이 전란 중에 틈틈이 쓴 <난중일기>를 보니 500년 전의 ‘세월호 침몰 기록’인 것만 같다. 침몰하는 ‘조선호’를 보는 이순신의 울분과 탄식과 눈물이 배어있다.


왜와 명의 동아시아 전쟁인 임진왜란에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 도독 진린은 자신의 공을 증명하기 위해 본국에 보내는 수급(목을 자른 머리)을 탐냈다. 유키나가는 길을 터주면 2천의 수급을 주겠다고 진린을 유혹하기도 했다. 그들이 자국인의 목을 베어 제공할 리는 만무했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베어지는 것은 조선인의 머리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관리들은 뇌물의 경중으로 죄의 유무를 판단했다. 총체적 부정이 총체적 침몰을 낳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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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체육관에 간 박근혜 대통령. 정용일 기자


왜군이 올라오자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친 왕, ‘조선호’가 ‘바람 앞의 촛불’처럼 꺼져가는데도 책무를 방기하는 리더들. 제 죄를 가리기 위해 정당한 비판에까지 ‘종북’ 딱지를 붙이는 것도, 이순신을 어떻게든 역적으로 몰아 제 자리나 보전하려는 행태와 비슷하다. 일기가 노출되면 역적으로 몰릴 수 있는 사달거리임에도 이순신은 울분을 드러내곤 했다.


<난중일기>에서 가장 많은 문장중 하나가 ‘매를 때렸다’는 구절이다. 이순신은 힘없는 백성은 한없이 사랑했지만 리더에겐 철저히 책임을 물었다. 실전에서 살리기 위해서였다. 사후약방문이나 쓰지않기 위함이었다. 또한 ‘밤새 식은땀을 흘렸다’는 대목이 많다. 백성과 나라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강박으로 그는 잠못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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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불과 13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맞이해야 하는 울돌목의 격전을 하루 앞둔 1597년 9월15일 장수들을 불러모아놓고 한 말이 그 유명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다하지 않으면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이를 다하고 죽는다면 죽어도 산 것’이라는 이순신 장군 식 부활 선언이었다.


리더가 이 ‘부활정신’을 잊고 제 자리를 벗어날 때면 제자리를 지킨 백성들이 희생된다. ‘내’가 죽어 ‘우리’를 살리고자했던 이순신이 지금 진도 바다에서 우리의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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