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울린 이 사람
문 앞에 사랑을 놓고 가신 집사님
삼십을 넘어서야 신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한 시골의 작은 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부임했다. 교회는 몇 안 되는 노인들만이 지키고 있었다. 몇해 전 큰 수해까지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시골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문제는 팍팍한 살림살이만이 아니었다. 온종일 변화 없는 지루함도, 친구 하나 없는 외로움도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호박 하나가 문 옆에 놓여 있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미영 기자
다음날 아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바깥을 보니 김화봉 집사님이 있었다. 늘 헝클어진 머리에, 후줄근한 행색으로 주책맞은 행동을 하기 일쑤여서 얼마 되지 않는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늘 핀잔을 듣던 분이었다. 예배는 늦거나 빼먹기 일쑤였고, 아침과 저녁으로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때나 벌컥벌컥 문을 열고 사택을 드나들었기에 나에게도 골칫덩이였다.
아마도 내 표정에 마뜩잖아하는 모습이 보였나 보다. 횡설수설 이리저리 말을 돌리던 집사님은 “어제 호박 드셨어요?” 하고 물어왔다. 그는 ‘성경을 잘 모르지만 성경 공부 시간에 무엇이든 처음 수확물은 하나님께 드려야 된다고 배웠노라’고 했다. ‘그런데 너무 보잘것없는 것이라 차마 교회로 가져갈 수 없어 사택으로 가져왔노라’고. 그리고 ‘전도사님 단잠 주무시는데 이까짓 것으로 깨울 수 없어 문밖에 두고 갔노라’고 말이다. 그러고는 ‘죄송하다’고 했다.
일순간 창피함이 몰려왔다. 난 그가 성경이 뭔지도, 믿음이 뭔지도,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심한 이라고 생각했었다. 동네의 주책거리가 되어 교회에 누를 끼치는 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뒤에도 집사님은 고추가 나는 철에는 고추 한 움큼을, 깨를 심고는 깻잎 한 소쿠리를, 아들아이가 냇가에서 잡아왔다며 잡고기 한 바구니를 아침 문간에 놓고는 돌아가셨다.
이후 알게 된 그분이 살아온 삶은 가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너무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살다 시집을 갔으나 남편은 정을 주지 않았다. 집안의 희망이었던 똑똑한 큰아들은 대학 졸업도 마치지 않은 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또 수해 때문에 살던 집이 무너져 할 수 없이 농협 빚으로 지은 집은 대출금을 갚지 못해 경매로 넘겨야 했다. 그런데도 그 모든 어려움은 그분이 야무지게 생활을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분은 내가 목사가 되어 서둘러 도시 교회로 떠나기 전까지 아침마다 문 앞에 무언가를 두고 가시는 일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주칠 때마다 쑥스럽게 웃으시며 ‘죄송하다’ 하셨다. 지금도 호박으로 된장찌개를 끓일 때면 그분이 생각나고는 한다.
강석훈 목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홍보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