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과 삶] 85살 기공지도사 윤금순씨
“화가 날 땐 흰사발에 맑은물 담아 지그시 보세요”
50대 중반에 시작한 기공으로 건강을 되찾고, 남에게 건강을 전파하는 윤금순 할머니가 깊은 명상에 들어갔다.
채식을 위주로 한 1일 1식의 소식과 3시간만 잠을 자는 소면으로도 윤씨는 활기찬 생활을 한다.
새벽 3시. 잠에서 깬다. 결가부좌를 튼다. 두 손을 단전에 모으고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숨을 깊숙이 들이마신다. 사방은 고요하다. 점차 깊이 명상에 빠져든다. 몸의 혈문(穴門)이 스르르 열린다. 우주의 에너지가 몸으로 들어온다. 내쉬는 숨으로는 몸 안에 있던 탁한 기운을 뽑아내고, 신선한 기운을 마신다. 온몸은 새로운 에너지로 충만해진다. 신선한 에너지는 단전으로부터 뿜어져 나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전달된다. 한 시간의 단전호흡을 마친 윤금순(85) 할머니는 30년째 한결같이 하루를 이렇게 시작한다.
“인(寅)시는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에요. 자정부터 천지의 기운이 음에서 양으로 바뀌고, 인시가 되면서 양 기운은 고조돼요. 이때 단전호흡을 하면 낮에 하는 것보다 곱절 이상 좋은 기운을 빨아들일 수 있어요. 이 좋은 시간에 어찌 잠을 잘 수 있나요?”
그는 우주의 에너지를 먹고 산다. 그러기에 하루 한 끼만 먹고도 산다. 1일 1식이다. 잠도 3시간만 잔다. 얼굴 혈색은 복숭아 빛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는 힘이 넘친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양손의 손가락 한 개씩만 짚고서 물구나무를 선다. 다리를 180도 벌리고 앉아 자유자재로 방향을 튼다. 허리를 뒤로 90도 이상 꺾은 자세로 오랫동안 단전호흡을 한다. 10대 체조선수 같은 자세로 몸을 푼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동작이 가능할까?
윤씨는 중국동포였다. 50대 중반까지 중국 창춘의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다가 퇴직했다. 그러나 의사였음에도 그의 몸은 종합병동이었다. 간경변 초기에 십이지장궤양, 위궤양, 관절염에 목디스크, 거기에 흉막염까지….
의사였음에도 그의 육체가 그렇게 망가진 이유는 떠올리기조차 힘든, 어렵고 괴로운 젊은 세월의 결과였다. 고향이 경북 달성인 윤씨는 15살이던 1944년에 만주로 이주했다. 당시 만주로 가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가족이 이주한 것이다. 그러나 만주는 혹독한 추위와 거친 자연환경으로 살아가기가 더 힘들었다. 아버지는 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갔고, 몸을 의탁한 큰아버지는 어린 윤씨를 이웃동네 나이 든 남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때 마침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서 입대를 권유했다. 장제스의 국민당과 치열한 내전을 벌이던 마오쩌둥의 팔로군은 젊은이들이 필요했다. 변복하고 윤씨 가족에게 접근한 팔로군 간부는 “입대하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고 부추겼다.
맨발로 40리를 걸어 옌지(연길)의 팔로군에 두 오빠와 함께 입대한 18살의 윤씨는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별다른 교육도 없이 간호병이 된 윤씨는 전선을 따라다니며 부상당한 병사들을 치료했다. 하루하루 생과 사를 넘나들었다. 수수밥과 옥수수밥으로 연명했다. 물이 없어 말 오줌으로 갈증을 면했다. 수혈할 피가 없어 간호병들은 즉석에서 자신의 피를 뽑아 환자들에게 수혈을 했다. 팔로군은 대장정을 거쳐 마침내 국민당을 이겼다. 두 오빠는 전쟁에서 살아오지 못했다. 전쟁중에 윤씨는 간호병에서 간호사로 승급했고, 군의군관학교에서 공부를 해 군의관이 됐다.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었다. 윤씨는 다시 전쟁터에 투입됐다.
두 번의 전쟁 겪으며 망가진 몸
단전호흡하며 에너지 생겼다
채식 위주로 하루 한끼 먹고
잠 3시간만 자는데 기운 넘친다
“어린이같은 마음 지니고 살아야”
“그때 일은 다시 기억하기도 싫어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어요.” 두번째 전쟁에서도 살아 돌아온 윤씨는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혁명열사 처우를 받았고, 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아 정식 내과 의사가 됐다. 그러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한 환자로부터 기공을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가 솔깃했다.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기(氣)를 서양 의학을 한 윤씨가 받아들이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윤씨는 조금씩 기공에 빠져들었다. “단전호흡을 하면서 명상에 들어가면 상상할 수 없는 에너지의 움직임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에너지는 나의 몸에 붙어 있는 나쁜 에너지를 밀어냈고, 질병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을 떠나기 시작했어요.”
윤씨는 열심히 기공을 배웠다. 사흘 기차를 타고 가서 배우기도 했고, 그렇게 배운 기공을 자신의 환자에 적응시키기도 했다. 양약으로 치유를 못 하던 환자에게 자신이 배운 기공을 가르쳐주니 병세가 눈에 띄게 좋아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숨졌다. 어머니는 유언으로 “비록 중국인들 사이에서 살았지만, 죽은 몸은 중국 땅에 묻지 마라. 화장을 해서 강물에 뿌려라. 뼛가루라도 고향 합천에 닿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고향이 그리웠다. 평생 잊고 살았던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 가서 살고 싶었다.
마침 한국의 정신과학연구소에서 윤씨를 기공과학연구원으로 초청을 했다. 5년 계약으로 한국에 왔다. 제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 제자들이 도와줘서 윤씨는 2004년 한국에 귀화했다. 그리고 자신의 호인 ‘난강’을 따 ‘난강기공연구원’을 차렸다. 윤씨를 따르는 제자가 수백명이다. “난강(暖江)의 뜻처럼 모든 이에게 따뜻한 기운을 주고 싶어요.”
윤씨는 평생 육식을 하지 않았다. “고기는 죽을 때 업(業)을 남겨요. 그런 고기를 많이 먹으면 사람의 몸에 그 업이 쌓여 나쁜 결과를 남깁니다.” 윤씨는 아침저녁엔 두유나 우유를 한잔 먹고, 식사는 점심에만 한다. 그나마 누룽지와 채식이다. “남들은 먹는 재미에 산다고 하지만 저는 안 먹는 재미에 살아요. 먹지 않으면 기감(氣感)이 살아나고 기력도 소모되지 않아요.” 윤씨 건강의 출발이다.
“화가 나면 흰 사발에 맑은 물을 담아 눈앞에 놓고 지그시 쳐다보세요. 화(火)를 물(水)이 끄는 것을 10분 내에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윤씨가 권하는 화를 푸는 비결이다.
“이 세상 울고 태어났는데, 살면서 울 일도 많았는데, 갈 때는 울지 말아야죠. 항상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생기를 지니고 살아야 해요. 그래야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파동을 줄 수 있어요.”
50대 중반에 시작한 기공으로 팔순이 넘은 나이에 청춘의 기운을 내뿜는 윤씨는 “병은 들어오는 길이 있으면 나가는 길도 있다”며 환하게 웃는다. 그의 흰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