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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nel: 한겨레 수행·치유 전문 웹진 - 휴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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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를 모르는 짓은 반드시 화를 부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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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명장면】 잠룡의 시절②
 
君君臣臣父父子子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다.” -‘안연’편 11장①
 
 

1. 정명(正名)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말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경공이 말했다.
“좋은 말씀이오! 정녕 만일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 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가 어찌 그것을 얻어서 먹을 수 있겠소!”②
(景公問政孔子 孔子曰 君君臣臣父父子子. 景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豈得而食諸. -<사기> ‘공자세가’)
 
 
제(齊)나라로 간 공자가 경공(景公· ?~서기전 490)을 만나 “임금이 임금다운” 정명(正名)의 정치철학을 설파했다는 이 장면은 공자의 제나라 망명 시절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일화이다.  조종(祖宗) 공자가 불과 30대의 나이에 동방의 패자(覇者)인 제나라 임금을 앉혀 놓고  "임금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은 유가들의 어깨를 한껏 으쓱이게 해주는 통쾌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전기적(傳記的) 사실’은 실제 사실과 얼마나 부합하는 것일까? 과연 무명의 외국 선비가 탁월한 재상의 보좌를 받으며 30여년째 재위하고 있는 50대 중후반의 노회한 임금에게 ‘임금이 임금다운게 정치’라는 ‘상식적인 언사’로 훈계할 수 있었을까?  이 ‘신화’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서기전 516년 36살의 공자가 제나라에 갔을 때 제나라는 북방의 진(晉), 서방의 진(秦), 남방의 초(楚)와 국력을 경쟁하며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환공(桓公;서기전 685~643 재위)의 전성시대와 비견되는 중흥기로서 여러나라로부터 동방의 패자 소리를 듣고 있었다. 경공은 바로 이 ‘소 패업’ 시대를 이끈 임금임에도 후세사람들에게 명군은 커녕 암군이란 소리까지 듣게 되는 묘한 성격의 군주였다.

 ‘나라가 나라답고 임금이 임금다운 나라’
 

춘추오패(春秋五覇③)의 첫머리를 장식했던 환공의 패업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위대한 제나라’에 걸맞는 ‘위대한 임금’을 원했다.  그러나 정작 임금인 경공은 재위기간 내내 이렇다할 통치철학과 역사의식을 발휘하지 못했다. 경공은 재상 안영(晏嬰· ?~서기전 500)에게 정치를 일임하고 자신은 축재와 사치에 골몰했다. 경공의 ‘탈정치’는 어쩌면 지원 세력도 정통성도 취약한 군주가 호족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처세술이었는 지도 모르지만, 그런 임금을 달가워 하는 대부와 국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런 중흥기에 임금이라는 작자가 사치와 허영이나 일삼는 ‘졸부’라니…”
시골뜨기 출신의 이방인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밝은 눈을 지녔던 공자의 시야에 제나라 조야의 이런 아킬레스건이 포착되지 않을 리 없었다.
경공은 제나라 역사상 가장 긴 기간인 58년을 임금자리에 있으면서 무려 4천필의 말을 소유한 대부호였지만, 정작 그가 죽었을 때 슬퍼한 백성이 몇이더냐고 (齊景公 有馬千駟 死之日 民無德而稱焉. ‘계씨’편 12장④) 훗날 공자께서도 탄식하지 않았던가….
오늘은 그 경공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해보겠다. 탐욕과 협잡, 배신과 복수로 점철된 악인열전 속의 군상(群像)을 보고 있노라면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선생님의 일갈이 왜 제나라 시절에 발화(發話)되었는 지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럼, 잠시 본론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한다면 공자가 임치에 도착하기 38년 전으로 돌아가 보기로 한다.
 
공자2.jpg

2. 임금의 부끄러운 죽음
공자가 태어나기 3년 전인 서기전 554년 여름 제나라 임금 강환(姜環·영공)이 죽었다. 영공(靈公)은 늙으막에 엉뚱한 일을 저질렀다. 장성한 태자를 변방으로 내쫓고 후비의 어린 아들을 후사로 세운 것이다. 영공의 죽음이 임박하자 권신 최저(崔杵)가 ‘비정상의 정상화’를 명분으로 궐기했다.  최저는 영공의 고명 대신 고후(高厚) 등 후비 세력을 제거하고 폐출된 태자를 옹립했다. 그가 장공(莊公)이다.  
장공 강광(姜光)은 일찍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전장과 외교무대를 누벼서인지 독선이 강한 젊은이였다. 군사활동을 좋아하여 무사와 용자를 총애했다. 그는 환공 시대의 패권을 되찾아오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히 드러냈다. 그러나 패자가 되기엔 인간적으로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후비를 직접 죽여 그 시체를 조정의 뜰에 보란듯이 던져놓았다. 출발부터 예(禮)를 모르는 군주로 자신을 각인시켰다. 

장공은 진나라에서 내란을 일으킨 호족 난영이 제나라로 도망쳐 오자 그를 환영했다. 안영은 진나라의 심기를 건드려 좋을 것이 없다며 장공을 만류했다.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방법은 신의뿐입니다. 신의를 잃으면 존립할 수 없습니다."  장공은 코웃음을 쳤다. 안영이 원로인 진수무(陳須無· ‘공야장’편에 나오는 진문자(陳文子)가 이 사람으로 당시 제나라 권문세가의 수장이자 명망가이다)에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번 임금은 아무래도 오래가지 못할 듯 합니다." (弗能久矣)
장공은 진나라 내분이 격화되자 그 틈을 이용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를 치고자 했다.
“이제 과인이 중원의 패자가 될 차례다.”
장공은 중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위대를 선봉으로 삼아 진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조가(朝歌. 위(衛)나라 도읍이자, 은나라의 옛 도읍지)를 빼앗았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장공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발단은 장공을 옹립한 집정대신 최저의 재혼이었다. 당공(棠公)이란 대부가 죽어 문상을 갔던 최저가 초상집 안주인을 보고 한 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 과부가 마침 가신의 누이였다. 얼마전 상처(喪妻)하여 적적하던 최저가 가신 동곽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보게 언, 자네 누이 참 미인일세그려. 내게 줄 수 없겠나?”(見棠姜而美之 使偃取之)
“동곽(東郭)씨와 최씨는 같은 강성(姜姓) 아닙니까?⑤ 어렵지 않을까요?”(男女辨姓 不可)
최씨와 동곽씨가 동성동본이니 남들이 쑥덕대지 않겠느냐고 동곽언이 슬쩍 튕겨본 것이다.
몸이 단 최저가 직접 점을 쳤다며 점괘를 궁중의 태사(太史)들에게 보였다.
최저의 ‘희망 사항’을 미리 접수한 태사들이 눈치없이 굴 이유가 없었다.
 
길(吉)!
 
최저는 그 길로 진수무에게 달려갔다.
‘진자만 눈감아주면 딴지 걸 놈이 없겠지.’
진수무는 그러나 간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글쎄요… 점괘 중에  ‘집에 들어가도 아내를 보지 못하니 흉하다’(入于其宮, 不見其妻. 凶⑥)는 효사(爻辭)가 조금 마음에 걸리는군요.”
미녀 과부를 얻고 싶은 욕심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던 최저는 자신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내 말이 그 말이올시다! 여자가 과부가 되었으니 흉이란 바로 남편의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죽은 남편이 액운을 다 지고 갔으니 내게 더 무슨 흉사가 있으리오!”(嫠也 何害 先夫當之矣)
이리하여 최저가 과부 당강(棠姜)을 후처로 맞이 하는데 성공했다.  한창 깨가 쏟아지고 있을 때, 의외의 곳에서 복병이 나타났다.  장공이 최저의 집에 놀러왔다가 새 안주인을 본 것이다.  
‘저런 미녀가 늙은이의 짝이라니!’
장공은 임금의 위세로 밀어붙였다.
"당강은 원래 내가 먼저 알던 여자였소. 안 그렇소, 동곽당?"
아무리 집정대신이라 해도 막가파식으로 나오는 임금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딱 한번.”
그러나 처음이 어렵지 일단 정을 통하는데 성공하자 장공은 아예 최저의 내실을 제 집 드나들 듯 하기 시작했다. 최저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넘치던  어느 날인가는 당강의 방에 걸려 있던 최저의 모자를 들고 나와 아무에게나 던져주는 호기를 부렸다. 시종이 걱정이 되어 장공을 말렸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不可)
“안되긴 뭐가 안돼. 최무자(崔武子)인들 과인이 준 벼슬이 없다면 한갓 볼품없는 늙은이일 뿐.”(不爲崔子 其無冠乎)
마침내 최저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누구 덕에 임금이 되었는데, 금수만도 못한 놈.”
 
어느날 최저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궁전에 전해졌다. 냉큼 최저의 집을 방문해 문병을 마친 장공은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고 당강의 방으로 갔다. 최저가 매수한 시종이 밖에서 문을 걸어 잠근 것도 모른 채 장공은 침실의 기둥을 두드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강이여, 어서 빨리 오시게나.
최저가 매복해 둔 무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쳐라.
 
장공은 어디선가 쏟아져나온 무사들을 보고 놀라 누대 위로 올라가 애걸했다.
“돈이고 벼슬이고 뭐든지 달라는대로 주마.”
“저희들은 주군의 무사일뿐입니다. 간음하려는 자를 잡으면 주살하라는 명은 있었느나 다른 명은 없었습니다.”(陪臣干掫有淫者 不知二命)
장공이 탈출을 시도했으나 화살이 허벅지를 꿰뚫었다. 담장 밑으로 떨어진 장공의 몸통에 창칼이 무수히 쏟아졌다.  제나라 어느 임금의 황당하기 짝이 없는 최후였다.⑦ (이상 <좌전> 노양공 25년, <사기> ‘제태공세가’)
 

3. 권신의 어이없는 몰락
장공을 시해한 최저는 영공의 서자들 중에 세력이 미미한 저구(杵臼)라는 공자를 골라 임금으로 세웠는데, 이 사람이 바로 경공이다. 2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나이에 외가가 노나라 망명객 집안⑧인 경공은 갑자기 불려나와 벌벌 떨며 임금 자리에 올랐다. 제나라 권력은 최저의 한 손에 들어갔다. 이듬해 당강이 아들을 낳았다. 늦둥이를 본 기쁨이 영공의 교훈을 잊게 할 만큼 컸을까? 이번엔 최저 자신이 멀쩡한 장자를 물먹이고 갓난아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큰 아들이 낙향을 자청하는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최저의 총신이 된 당강의 오빠 동곽언과 당씨 세력은 이 참에 아예 결판을 내겠다고 덤볐다.
“본읍은 최씨의 선산이 있는 곳. 새 종주(당강의 아들)가 섰는데, 어떻게 전실 자식이 본읍을 차지합니까?”
이 소식을 들은 최저의 두 아들이 격분했다.
 
늙은 아버지가 사랑하기에 참고 있건만.
 
두 아들은 아버지의 ‘혁명 동지’로서 정권의 2인자인 경봉(慶封)을 찾아가 뒷감당을 부탁했다.
“아버지를 위해 집안을 정비하고자 합니다.”
사태 판단이 서지 않은 경봉은 일단 그들을 돌려 보낸 뒤 가신 노포별을 불렀다.
“어찌하면 좋을까?”
노포별이 말했다.
“최씨는 본래 임금(장공)의 원수인데, 드디어 하늘이 그를 버리려나 봅니다. 지들 가족간의 내란이니 주군께서 걱정할 게 뭐 있습니까?”
경봉이 망설이자 노포별이 바짝 다가가 앉으며 말했다.
“최씨의 화는 경씨의 복입니다.”(崔之薄 慶之厚也)
며칠 후. 최저의 두 아들을 다시 부른 경봉이 큰 결심을 했다는 듯이 말했다.
“최무자(崔武子)를 위하는 길이라니 그리 하시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도 돕겠네.”
두 아들은 그 길로 가병을 이끌고 아버지 집으로 가 동곽언과 당무구 일파를 척살했다.  경악한 최저는 신발도 못 신은 채 ‘혁명 동지’ 경봉에게 달려갔다.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네. 나는 죽어도 좋지만 가문이 망해서는 안되네.”
경봉이 시치미를 뚝 떼고 놀란듯이 최저를 위로하며 말했다.
“최씨와 경씨는 한 배를 타고 있습니다. 내가 수습해드리리다.”(崔慶一也, 爲子討之)
경봉은 노포별에게 최씨 집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다. 최저의 두 아들은 자기 편인줄 알았던 경봉에게 보기좋게 뒷통수를 맞고 말았다. 난전이 벌어지자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게 된 당강은 그만 내실의 기둥에 목을 맸다.
상황이 종료되자 노포별이 최저를 수레에 태워 집앞에 내려주며 말했다.
“분부대로 거행했습니다.” (復命)
적당히 손만 봐줄 줄 알았던 최저는 쑥대밭이 된 집안에서 두 아들과 당강의 시체를 발견했다. 망연자실.
최저는 넋이 나간 채 당강이 목을 맨 기둥에 목을 맸다.
 
‘집에 돌아가도 아내를 보지 못한다. 흉.’(入于其宮 不見其妻 凶)
 
점괘는 적중했고 최씨는 멸문했다.
자신을 옹립한 최저가 이상한 방식으로 권력의 무대에서 사라지자 경공은 공포에 질려 오줌을 쌀 지경이었다.
 
불똥이 나한테 튀는 게 아닌가?
 
안영과 진수무가 오금이 저려 덜덜 떨고 있는 경공의 소매를 조용히 끌어다가 용상에 앉히고는 다독였다.
“전하, 가만히. 그냥 가만히만 계십시오.”

공자7.jpg

 
4.  쥐에도 가죽이 있건만
공자가 네 살 때 장공이 죽고, 2년후에는 장공을 시해한 최저가 노욕에 빠져 자멸했다. 최저의 집안싸움을 교묘히 이용해 제나라 권력을 독차지 한 사람은 ‘혁명동지’ 경봉(慶封)이었다. 호랑이가 사라진 골에 여우가 왕 노릇한다던가. 2인자도 없는 1인자가 된 경봉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공족의 후예로서 대군벌인 경봉의 유일한 약점은 일자무식이란 것 뿐이었다.
장공을 시해하고 경공을 세운 그 해 수상 최저는 좌상 경봉을 노나라에 사절로 보냈다. 임금이 바뀐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정점에 선 경봉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수레를 타고 곡부에 나타났다. 엄청난 부자들이기도 한 제나라 귀족들은 평소 수레 꾸미기를 좋아했는데, 가난하지만 적통의 문화국가를 자부하는 노나라 지식인들의 눈에는 이런 제나라 귀족문화가 무식한 졸부들의 허세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주제를 모르는 짓은 반드시 화를 부르니 수레가 아무리 아름다운들 무슨 소용이랴(服美不稱 必以惡終 美車何爲)
 

노나라 수상 숙손표(叔孫豹·숙손목자)가 경봉을 초대해 연회를 베푸는데 경봉이 의전을 알지 못해 무례하게 굴었다. 숙손표가 좌중의 사람들에게 건배를 제의하며 시 한 수를 읊었다.
 

   상서유피 인이무의(相鼠有皮 人而無儀)
 인이무의 불사하위(人而無儀 不死何爲)
  

경봉은 재상이 읊은 시가 무슨 뜻인지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다가 좌중의 인사가 박수를 치며 웃자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이상 <좌전> 노양공 27년)
시의 내용은 이러했다.
  
  쥐에도 가죽이 있거늘 사람이라면 체통이 있어야지
 사람으로 체통을 지킬줄 모르면 죽은 거나 진배없지  (<시경> 용풍(䧡風) 편 ‘상서’⑨)
 

5. 분노의 오리국물
까막눈으로 매일 같이 조정 대사를 결재하는 일에 신물이 난 경봉은 아들 경사(慶舍)에게 정사를 일임하고 자신은 사냥과 연회로 인생을 즐기기로 했다. 총신 노포별과 첩을 바꿔끼고 노는 재미가 쏠쏠하자 아예 조당을 노포별의 집으로 옮겼다. 문고리 권력을 쥐게 된 노포별이 어느날 경봉과 대작하면서 사면령을 건의했다. 장공의 호위무사였다가 망명한 동생 노포계를 사면 대상에 포함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과거를 뉘우치는 자들을 특별히 용서해 주시면 목숨 바쳐 충성할 것입니다.”
노포별은 귀국한 노포계를 경사의 가신으로 밀어넣었다. 노포계는 문무를 겸비한데다 미남자였는지, 경사의 딸이 그를 좋아해 남편으로 삼았다. 경사의 신임을 얻어 사위까지 된 노포계는 ‘망명 동지’ 왕하를 불러들여 나란히 경사의 좌우를 호위했다.
어느날 조정에 출근한 공자(公子)들이 점심식사를 하는데 공선(公膳⑩)으로 늘 나오던 닭고기 두 마리가 나오지 않고 오리가 나왔다. 그것도 국물만 멀건 채로. 모두들 젓가락을 내려놓고 요리사를 불러 호통을 쳤다.
“우린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꾸민 일이 분명했다. 대부분 임금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뻘되는 공자들과 경대부들은 격분했다. 
 
경봉, 이 놈이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하는구나.
 
오리국물 사건이 자신들을 떠보려는 술책으로 판단한 공실 사람들과 덫을 놓고  ‘경거망동’을 기다리는 경씨 세력 간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경봉은 공자들이 사소한 음식 일로 경씨를 비난하고 다닌다는 보고를 받고 노포별과 상의했다.
“저 놈들을 어찌할까?”
“한줌도 안되는 그깐 놈들, 가죽을 벗겨버리면 그만입니다.”
애당초 오리국물 사건은 노포별의 주도 하에 경씨의 가신들이 공실의 재산을 노려 꾸민 일이었다.
노포별이 안영에게 사람을 보내 바람잡이 노릇을 할 수 있는 지 떠보았다.
“이 기회에 탐욕스런 종친들을 정리해 버리고 부귀영화를 함께 합시다.”
안영이 납작 엎드렸다.
“우리 집안은 선대⑪부터 권력과 무관합니다. 실력도 배짱도 없습니다. 오늘 일은 안 들은 것으로 맹세하겠습니다.”
경봉세력이 호족들을 은밀히 떠보고 있다는 첩보가 세작을 통해 진수무의 귀에 들어갔다.
진수무가 아들 무우(無宇·진환자)를 조용히 불렀다.
“아무래도 경씨와 공실 사이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것 같다. 우리 진씨 가문에 어부지리가 있을까?”(禍將作矣 吾其何得?)
진무우가 아버지에게 속삭였다.
“장가(莊街)에 있는 경씨 목재 100 수레를 얻을 것 같습니다.” (得慶氏之木 百車於莊)
장가는 주로 관청이 밀집해 있는 거리이니, 경씨를 위해 일하던 조정 관리들이 장차 자신들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란 비유였다. 즉, 이번 사태를 잘 활용하면 진씨가 정권을 얻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진수무가 되물었다.
“얻은 뒤에는?”
그리고 아들의 귀에 속삭였다.
“한 번 얻은 것은 잘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하느니.”(可愼守也已)
 
한편, 오리 국물 사건을 꾸민 노포계와 왕하는 경사에게 점괘 하나를 보였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치려고 뽑은 괘입니다. 성공하겠습니까?”(或卜攻讐 敢獻其兆?)
“우두머리를 잡겠지만, 피를 좀 보겠다.”(克. 見血) (이상 <좌전> 노양공28년)

<계속>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논어> 원문의 한글 번역은 <논어집주>(성백효 역주, 전통문화연구회 편)와 <안티쿠스 클래식6-논어>(한필훈 옮김)를 나란히 싣는다. 각각 신구 번역문의 좋은 사례로 생각되어서이다. 표기는 집(논어집주)과 한(한필훈 논어)으로 한다. 이와 다른 해석을 실을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이번 호부터 논어 영어번역을 싣는다. 표기는 영문 L로 한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雅各)본을 사용하였다. 필자의 지우 이택용 박사가 본인이 제작한 프린트 책자를 선물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감사드린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안연’편 11장
  齊景公問政於孔子 孔子對曰 君君臣臣父父子子. 公曰 善哉 信如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雖有粟 吾得而食諸?
 집-제경공이 공자에게 정사를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임금은 임금노릇하며, 신하는 신하노릇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노릇하며, 자식은 자식노릇하는 것입니다.”  공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진실로 만일 임금이 임금노릇을 못하며, 신하가 신하노릇을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노릇을 못하며, 자식이 자식노릇을 못한다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 그것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한-제나라 임금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다.” “훌륭한 말씀입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수 없겠지요.”
 L-The Duke Ching, of Ch’i, asked Confucius about government. Confucius replied, “There is government, when the prince is prince, and the minister is minister; when the father is father, and the son is son.” “Good!” said the Duke; “if, indeed, the prince be not prince, the minister not mimister, the father not father, and the son not son, although I have my revenue, can I enjoy it?”   

 
   ② <사기> ‘공자세가’(김원중 옮김)
 사마천은 ‘공자세가’를 쓸 때 <논어>를 참고한 듯 한데, 이 대목은 ‘안연’편을 참고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안연’편(주 1번 참조)에 있는 ‘마주할 대(對)’ 자가 빠져있고, 안연편에는 없는 ‘어찌 개(豈)’ 자가 삽입돼 있다. 사마천이 굳이 이렇게 옮기는데는 어떤 이유가 있었는 지 궁금하다. 
 

 ③ 춘추오패(春秋五覇)
 중국 춘추시대에 왕을 대신하여 패권을 행사하는 제후를 패자(覇者)라 한다. 제후들을 회맹에 소집하여, 맹주(盟主)로서 정벌과 조공 등 주요 의사결정권을 주도적으로 행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춘추시대에 이러한 패자가 5명 나왔다고 해서 춘추오패라고 한다. 제나라 환공을 필두로 진(晉)문공, 초(楚)장왕, 오(吳)왕 합려(또는 월(越)왕 구천), 진(秦)목공 등을 주로 꼽는다. 오패라는 관념은 전국시대 이후 유행한 오행(五行)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특별히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④‘계씨’편 12장
 齊景公 有馬千駟 死之日 民無德而稱焉. 伯夷叔齊 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其斯之謂與).
 집-제경공이 말 천사(1사는 4필이다. 고로 4천 마리이다)를 소유하였으나, 죽는 날에 사람들이 덕을 칭송함이 없었고,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아래에서 굶주렸으나 사람들이 지금에 이르도록 칭송하고 있다. (그 이것을 말한 것이다.- 이 부분은 논어 편찬시 잘못 삽입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한-공자가 말하였다. “제나라 군주 경공은 말을 4천 필이나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죽었을 때 칭송하는 사람이 없었다.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아래서 굶어 죽었지만,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을 칭송하고 있다. ”
 L-The Duke Ching of Ch’i had a thousand teams, each of four horses, but on the day of his death, the people did not praise him for a single virtue. Po-i and Shu-ch’i died of hunger at the foot of the Shau-yang mountains, and the people, down to the present time, praise them. (Is not that saying illustrated by this?)”
 

 ⑤ 제나라 공실의 성은 강씨인데, 여기서 유력한 귀족들의 성씨가 갈라져 나왔다. 고씨와 난씨, 최씨와 경씨 등이 대표적이다. 최저는 정공의 후손이며, 동곽씨는 환공의 후손이다.
 

 ⑥주역 64괘 중  47번째 택수곤(澤水困) 괘의 세번째 효이다. 세번째 효의 전문(全文) 은 ‘곤우석 거우질려(困于石 據于蒺黎) 입우기궁 불견기처 흉(入于其宮 不見其妻 凶)’이다.
 택수곤(澤水困)에서 택(澤)에 해당하는 태(兌)괘는 소녀(少女)를 의미하며, 수(水)는 감(坎)괘로서 중남(中男)을 의미한다. 따라서 중남과 소녀가 한짝을 이루는 양상이므로 태사들은 최저의 재혼 점괘로 길하다고 풀이한 것이다. 그런데 최저가 가져온 괘는 택수곤괘의 세번째 효(爻)가 움직여 28번째 괘인 택풍대과(澤風大過)로 변한 지괘(之卦)가 포함되어 있었다. 태사들은 최저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이런 괘의 변화를 따로 풀이하지 않은 것이다.
 진수무는 태사들과 달리 정석대로 지괘를 감안하여 점풀이를 했다. <좌전>노양공 25년조(정태현 역주)에 따르면 진수무는 최저가 가져온 괘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택수곤의 세번째 효가 변하면 택풍대과괘가 됩니다. 즉 물(水)이 바람(風)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는 남편(수=감=중남)이 바람으로 바뀌어 아내(택=태=소녀)를 흔들어 떨어뜨리는 상이니 취해서는 안됩니다. 또 그 점사(占辭)가 이르기를, ‘바위에 곤란을 당하고(곤우석) 납가새 위에 앉은 것이라(거우질려). 집에 들어가도(입우기궁) 아내를 보지 못하니 (불견기처) 흉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곤우석’은 일을 하여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거우질려’는 믿는 사람에게 상해를 당한다는 뜻이며, ‘입우기궁 불견기처’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⑦ 제 장공 강광은 이때 세번 목숨을 간청하였다. 처음에는 살려줄 것을 애걸했고, 무사들이 듣지 않자 보복하지 않고 벼슬을 줄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약하겠다고 했다. 무사들이 이마저 거부하자 강광은 종묘로 가서 열성조 앞에서 자결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번의 거절은 모두 사실상 최저의 뜻이었다.
 
 ⑧경공의 생모 이름은 목맹희(穆孟姬)이다. <좌전>에 보면, 서기전 575년 노나라에서 망명 온 숙손교여(시호는 선백(宣伯)이다)가 자신의 딸을 영공의 후비로 들였으며, 이 여자가 저구를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숙손교여가 망명오기 전에 먼저 그의 동생인 숙손표가 망명을 와 있었다. 표의 시호는 목자이다. 즉 경공 생모의 이름이 ‘선맹희’가 아니라 ‘목맹희’인 것으로 보아, 이 여자는 숙손교여의 딸이 아니라 훗날 노나라 재상이 된 숙손목자의 딸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아무튼 이런 사실로 볼때 경공은 즉위할 당시 나이가 28살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우리나라 보성 선(宣)씨는 노나라 숙손선백의 가계로부터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⑨<시경> ‘용풍’ 상서(조두현 역해)
 相鼠有皮 人而無儀 人而無儀 不死何爲/相鼠有齒 人而無止 人而無止 不死何俟/相鼠有體 人而無禮 人而無禮 胡不遄死
 보아라, 쥐도 가죽이 있는데, 사람이 되어서 체모가 없다니. 사람이 체모가 없다면, 죽지 않고 무얼 하는가/보아라, 쥐도 이빨이 있는데, 사람이 되어서 버릇이 없다니.사람이 버릇이 없다면, 죽지 않고 무얼 기다리는가/보아라, 쥐도 손발이 있는데, 사람이 되어서 예의가 없다니. 사람이 예의가 없다면, 어째서 빨리 죽지 않는가.
 
 ⑩조정에서 공무 중인  경대부에게 제공되는 식사를 공선(公膳)이라고 한다.(<좌전>)
 
 ⑪안영의 아버지 안약(晏弱·안환자)은 본래 송나라 귀족으로 내란을 피해 제나라로 망명하였다. 안약 일족은 제혜공으로부터 임치 서쪽에 있는 안 땅을 식읍으로 받았는데, 안씨는 여기서 유래하였다. 안약은 훗날 동이족 나라인 래나라 정벌에 공을 세워 래나라 이유 땅을 식읍으로 받아 세거지로 삼았다. 사마천이 안영을 래이 출신이라 한 것은 이에 근거한 것이다.  이처럼 안씨는 토착 세거지가 일천한 망명가문이었으므로 전통적인 대호족들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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