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 수녀의 또래 멘토
5. 엄마를 대신 할 수는……
“아무튼 별종이에요. 어느 때는 두렵다니까요? 저런 얘가 왜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
센터의 베테랑 복지사 수진 선생님의 말이다. 나도 갓 입소한 소정이를 처음 만날 때 충분히 당황했다. 170센티미터의 키. 운동선수 같은 발달된 근육. 소정이는 굵은 목소리로 “수녀님, 먼저 앉으시죠”라는 말과 동시에 의자를 착, 빼 주는 게 아닌가. 마치 고급 어디를 가면 손님을 맞이하는 숙련된 종업원의 각도 맞춘 동작이었다. 그러면서도 자기 처지를 아는 절제가 있었다.
“어, 그래 어, 소정이도 앉아.”
“예, 수녀님.”
맞은편에 앉은 소정이는 듬직하고 품위까지 있어보였다. ‘저런 얘가 무슨 일을 저질렀을까.’ 모르는 누가 보면 저 덩치의 소정이를 센터 복지사로 착각하고도 남는다.
“소정아, 너는 참 좋은 점이 많구나.”
“뭐가요?”
“센터 친구들에게서 보기 드문 행동을 너가 해서 그래. 온지 며칠 안 됐는데도 예의바르고, 어른 알아보고…….”
“선생님들도 절 보고 그래요. 지난 주 일요일에 아빠가 면회 왔을 때 사 오신 초콜릿을 잡수라고 나눠 드렸더니 선생님들이 막 저를 보고 놀라시는 거예요.”
그럴 만도 하지. 마음이 가난한 아이들은 남에게 줄 주를 모른다. 어른들에게는 더 못한다.
*청소년들의 고민과 방황을 그린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중에서
16살. 소정이의 처음 직장은 버스터미널 종합 안내원이었다. 그 일은 친절한 말, 인사, 웃는 얼굴. 늘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것이 필수였다. 소정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 무조건 인사를 했다. 어르신이 길을 못 찾고 헤매면 다가가 “어디 궁금하신 것 있으세요?” 하고 먼저 여쭈었다. 이런 행동은 의지적 노력도 있었으나 소정이의 행동 중심에는 엄마가 계셨다.
엄마는 늘 어른들에게 공손해라. 남을 기다리기 보다는 너가 먼저 다가가라고 가르치셨으니까. 엄마는 시장 할머니들을 엄마라고 부르며 힘내시라. 아프지 마시라며 그분들 손을 잡아주었다. 엄마는 이웃에게도 친절했다. 잡채. 김밥을 하면 옆집과 나눠 먹었다. 그것을 소정이는 봤다.
한 번은 70대 후반쯤 보이는 정정한 노부부가 여행을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캐리어 가방을 잡고 넘어지셨다. 안내원인 소정이는 급히 뛰어가 우선 괜찮으시냐고 묻고 할아버지를 일으켜드렸다. 무거운 캐리어 가방 손잡이는 잡을 수 없이 부셔졌다. 소정이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민원실에 들어가 대체할 가방이 없냐고 물었다. 거기서는 방법이 없어서 곧장 매표원 언니들에게 사정을 말하여 만 원씩 받아냈다. 그 돈으로 가방을 사서 물건을 다 넣어 드렸다. 또 한 번은 할머니가 전라도 광주를 가시려고 하는데 차비가 모자랐다. 매표원 언니들이 그때는 안 된다고 거절했다. 소정이는 자기 돈으로 할머니에게 표를 사 드렸다.
안내원을 그만 두기 한 달 전, 그날은 설이었다. 훈훈하게 생긴 신사가 길을 묻기에 친절하게 가르쳐 드렸다. 그분은 고맙다고 하면서 엽서 한 장을 주었는데 짧은 명언이 적혀 있었다. <늘 친절해라. 그러면 언젠가 너에게 돌아올 것이다.> 소정이는 읽으며 되게 놀랐다.
터미널에는 멍하니 있는 이들이 많았다. 평소에도 소정이는 한 번씩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인사하고 말 상대가 되어준다. 특히 설 같은 명절에는 갈 때 없는 사람들이 터미널 주변을 맴돌며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며 외로움을 달랜다. 제복 입은 소정이가 다가가 인사를 하고 추우니까 안에 들어가자고 권하면 같이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고마워했다.
이런 모습을 유심히 본 터미널 팀장님은 소정이를 부산에 있는 핸드폰 회사 고객 상담과에 추천해 주어 면접을 보게 했다. 그때 기억에 남은 질문 하나가 있다.
“소영씨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했던 행동이 정말 좋은 행동이었나요?”
망설임 없이 소정이는 대답할 수 있었다. 진실만 말했을 뿐이기에 좋았다 라고. 일주일 뒤에 합격 통보가 왔다. 모바일 상담과에 들어갔다. 소정이 18살 때의 일이다. 청소년인 소정이를 찾는 손님은 자녀가 쓴 핸드폰 요금 문제로 잔뜩 화가 나서 온 부모들이었다.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느냐 따지는 그분들을 달래서 보내는 게 소정이의 임무였다. 찾아 올 때는 욕을 하고 화를 냈으나 나갈 때는 웃으면서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갔다.
그 회사는 두 주에 한 번씩 서비스 교육이 있었다. 화를 내지 마라. 인상을 쓰지 마라. 손으로 제스처를 쓰지 마라. 항상 존댓말을 써라. 이 모든 것이 몸에 배어 있도록 했다. 소정이는 아무리 상대방이 욕을 해도 그것을 좋게 풀이 했다. 왜냐면 늘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웠으며, 우리가 받아주지 않으면 고객이 어딜 가서 상담을 할 수 있겠느냐는 서비스 정신으로.
텃세라는 것도 경험했다. 그러나 잘 견뎌냈다. 그곳에서 약 8개월가량 일을 하고 떠날 때는 송별파티까지 해 주었다. 어른들은 소정이에게 요즘 청소년들이 너만큼만 해도 정말 세상은 좋아질 것이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회사를 나와 소정이는 축가 아르바이트를 했다. 노래를 불러주는 것도 서비스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기뻐하고 반응이 좋았으나 들어오는 돈이 너무 적어 4개월 밖에 못했다.
보증금 200만원에 월 35원을 내는 원룸생활. 난방비가 포함되는 겨울에는 40만원을 내야 했다. 동생에게 다달이 용돈을 보냈다. 소정이가 통장에 돈을 입금하면 동생이 카드로 찾게 했다. 얼마 전 엄마 거주지를 알게 되었다. 다리가 아파 일을 못한다는 엄마에게도 생활비를 보냈다.
통장의 잔금은 점점 바닥이 보이는데 마땅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구해지지 않아 많은 생각이 왔다갔다 하던 그 시기에 친구들이 집으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안정된 거주지가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고향 친구, 부산에서 사귄 친구들은 소정이 원룸에서 장기 숙박에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그들 중에는 이미 범죄에 발을 들어놓은 친구도 있었다.
“너 그 핸드폰 어디서 났어?”
“거기서 슬쩍했어.”
“너 그 돈 뭐야?”
“핸드폰 매장 털어서 받은 거야.”
친구들은 그런 대화가 일상적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웠다. 나쁜 일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자기가 훔친 것은 이 정도 쯤이야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남이 했을 때는 엄청 욕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소정이는 그들을 믿었다. 돈도 아끼지 않았다. 친구니까. 아버지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처럼 친구들도 분명 가족들이 믿어주지 않기에 자신에게 온 거라고 마음으로 감쌌다.
이제 남은 돈은 70만원.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고 의욕도 사라졌다. 소정이는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끊을 수 없는 친구들. 이들 차비까지 내니까 50만원이 남았다. 소정이는 아픈 엄마에게 40만원을 보내고 10만원만 남겼다. 차 안에서 친구들은 소정이를 유혹했다.
“돈 진짜 많이 벌 수 있어.”
“솔직히 한 달에 100만원 벌 때에 이번에 한 번 하고 노는 게 났지. 너도 이제 힘들게 살지 마.”
집을 나온 청소년은 어떤 보호막도 없이 너무 노출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자기들끼리 공간을 만들려고 모텔, 여관을 간다. 배는 고프고 밥은 먹어야 되니 돈이 급급해진다. 먹고 자는 방이 없으니까 알바 할 생각을 못한다. 그러니 빨리 돈을 벌어 방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다. 범행이 나쁘다거나 잡히면 어떻게 된다는 걸 생각 않는다. 아니 자신들은 잡히지 않는다고 믿는다.
일은 그만 둔 상태. 일자리 구하기도 쉽지 않다.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두 갈래로 갈린다. 한 쪽은 아닌데 아닌데. 한 쪽은 하자하자하자……. 결국 소정이도 그들 계획 속에 든 한 사람이 되었다. 이미 핸드폰 가게를 턴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지하철을 타면서 사전답사를 했다. 조용하고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
처음엔 밖에서 망을 봤다. 그 다음에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이 원했다. 소정이는 진열대에서 꺼낸 핸드폰을 담을 수 있도록 주머니를 들고 있었다.
세 번째 합세 할 때 느낌이 왔다. 이제는 잡혀도 빠져 나갈 수 없겠구나 하는. 소정이는 숨어 다녔다. 순찰차가 지나만 가도 왠지 찔렸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행동이 되지 않았다. 큰 도로를 가다 순찰차가 있으면 얼른 골목으로 빠졌다. 그러나 소정이 말해 의하면 아무리 숨어 다닌다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 한 모텔에 숙박하러 들어갔는데 그 집 주인이 떼거리로 몰려온 이들을 이상하게 여기고 CCTV 영상을 SNS에 올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소정이와 그 친구들은 그 지역을 다시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몇 명은 CCTV에 잡힌 그 옷과 신발 그대로인 채. 일행 다섯 명은 한 마디로 용감한 시민에 의해 잡혔다. 소정이는 그런 식으로 잡힐 줄 몰랐다.
청소년 부모들에게 여동생은 초등학교, 나는 중학교 입학식이 있는 날 엄마는 집을 나갔다. 키는 옆집에 맡기고 문 앞에 쪽지를 남긴 채. 나와 동생은 이틀 동안 잠도 안자고 울었다. 충격에서 깨어나니 엄마가 해야 할 일, 엄마가 있었던 자리에 내가 들어가야 했다. 동생을 깨워 학교에 보내야 하고, 밥도 해야 하고……‧ 나의 시간이 없어졌다. 학교는 항상 지각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서웠지만 좋아했고 아버지에게 칭찬받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청소년 부모님들에게 아이를 믿어주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아이가 결정을 했을 때는 그만큼 생각을 하고 결정한 것이기에. 그만 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물어본다. 그리고 너의 결정을 믿는다. 이러면 방황을 하더라도 빨리 정신을 차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믿는 게 아닙니다. 엄마가 떠나기 전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 기억하시나요? 친구를 만나고 귀가 시간이 늦을 때마다 아빠는 내가 너에게 죽을죄를 졌냐며 화를 냈다. 아빠도 낙이 없으셨겠죠. 그러나 부모마저 화를 내면 의지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다 아예 집을 나왔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하고서. 나는 밖에서 인정받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밖에서 나의 행동은 평소에 엄마가 보여준 모습이었습니다. 엄마는 집을 나가기 전, 4년 동안 성실하게 힘든 마트 일을 하셨습니다. 이웃과 정을 나누며 어른들에게 잘 하신 엄마를 내가 안 보는 것 같아도 나는 다 보았으며 내 몸이 알고 있었습니다. 엄마, 좋은 습관을 내게 남겨준 것 감사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가출까지 저는 엄마를 닮고 말았습니다. 집을 나와 지내던 3년 동안 아버지는 전화 한 통이 없었다. 다시 집에 갔을 때 “오랜만이네”가 다였다. 그런 아빠가 센터에 있는 나를 보러 처음 면회 오신 날. 아빠가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을 때 나는 통곡하고 울었다. 그리고 모든 아픔이 사라졌다. 아빠의 그 한 마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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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 이름만으로도......
남민영 수녀
엄마의 이름에는
은은한 제비꽃 향내가 난다
엄마의 이름에는
봄 햇살 같은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엄마의 이름에는
마음도 설레게 하는 봄바람이 분다
‘엄마’ 그 이름만으로도……
지구의 무게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주님!
당신의 사랑을 가장 닮은 엄마의 마음을
부디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선물해주소서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지니는
엄청난 힘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엄마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이 거룩한 이름을 끝까지 지키며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 곁을 지키게 하소서
‘엄마’ 그 이름만으로도
가장 위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소서.